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 민족 화해 Vol. 117 인터뷰 내용
권두 인터뷰 -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
안보엔 단호하되,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유연성 포기해선 안돼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을 수식하는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변호사이자, 법학박사, 검사장, 대통령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장관, 3선 국회의원 그리고 석좌교수이자 4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철언은 노태우 정부 시절 북방정책을 입안·추진하고 대북밀사로 북한과 40여 차례 회담한 ‘남북관계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6월 28일 강남구 삼성동 그의 사무실에 박철언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초당적이고 포용적인, 그리고 유연한 대북정책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탈이념적이고 실용적인 남북관계의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담 박병규 민화협 상임집행위원장
정리 김도희 민화협 1020통일공감기자단
사진 김성헌 객원작가
Q.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 대북 밀사로 수십 차례 북측과 회담하며 북방정책의 기틀을 놓았다. 회고록(『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2』/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을 보면 청와대 및 정부 내에서 북방정책 추진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과의 갈등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정책 추진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우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강력한 남북 평화공존, 북방정책 추진 의지가 있었다. 노 대통령은 탈냉전 시기 북한을 포용하는 북방정책을 통해 남북 상호 존중과 평화통일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예컨대 1988년 발표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의 내용을 보면 자주, 평화, 민주, 복지 원칙에 입각해 민족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통일 정책을 약속했다. 남북 왕래와 상호 문호개방, 남북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추구 등이다. 남북 간 대결외교를 종결하자는 노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없었다면 북방정책은 입안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두 번째는 실무를 담당했던 이들의 노력이다. 1985년 7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남북은 42차례에 걸쳐 비밀회담을 가졌다. 나는 당시 남측 수석대표로 활동했는데,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남북 대표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오갔다. 나 역시 20여 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판문점 북측지역부터 개성, 평양, 백두산 아래 삼지연 김일성 주석 별장까지 방문하며 북측과 소통했다. 북측 대표 역시 판문점 남측 지역과 서울을 찾았다. 백화점과 동대문 시장도 구경시켜주고, 한라산 백록담 아래까지 가서 회담을 했다. 그런 노력들이 북한 대표들과의 신뢰구축에 큰 도움이 되었고, 순조로운 북방정책 수행과 남북대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후 나와 각 부처 실무책임자들은 3단계 통일방안을 구상했다. 신뢰구축과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는 단계, 그 다음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남북 연합단계, 마지막으로 단일민족국가를 구성하는 단계다. 이런 구상을 노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밝혔다. 가장 현실적인, 유일한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남북비밀접촉 중 남북 수석대표 사이엔 24시간 동안 가동되는 핫라인이 있었다. 1985년 9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성사를 통해 서울-평양을 왕래하는 행사도 있었다. 1990년에는 서울-평양 교환 축구경기가 있었다. 1991년 체육청소년부장관으로 재직할 때는 청소년 축구-탁구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대회에 출전했다.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은 포르투갈에서 8강까지 진출하고, 탁구는 현정화-리분희가 한 조가 돼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때 북측 단장이 지금 IOC 위원장 장웅이다. 남북 간에 이런 여러 분단극복의 사례, 이정표가 있었다. 대통령의 의지와 더불어 대통령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실무를 힘있게 추진할 실무진이 없었으면 북방정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Q. 그동안 역대 정부는 각각의 철학을 기반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해왔다. 김대중 대통령을 시작으로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기 정상회담도 여러 차례 이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는 더디게만 보인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 보는가.
“우선 북한 수뇌부가 여전히 굉장히 경직돼 있다. 개방을 두려워하고, 시종일관 대남 적화전략을 견지하고 있다. 과거 북한의 무력도발에서 알 수 있듯 수뇌부의 경직성이 여전하다.
아울러 역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일관성이 부족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남북관계가 냉·온탕을 반복하다 결국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의 가시적 성과는 거뒀지만 북핵 문제를 사실상 방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응하지 않음에도 비핵·개방·3000 정책을 고수하다 천안함, 연평도 무력도발 사태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는 아예 드레스덴 구상을 통해 북한이 가장 꺼리는 독일 흡수통일 모델을 제시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구축하려 노력했지만, 북미 간 중계자 역할만 고수했고, 북미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며 북한의 실질적 핵무장을 막지 못했다.
대중외교를 대미외교보다 경시했다는 점도 있다. 현실적으로 북한에 영향력을 가장 크게 가진 건 중국이다. 중국은 북한 핵무장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도 비핵화 노력을 형식적으로만 해왔다, 미국이 패권 유지를 위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봉쇄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긴장관계가 완화되지 않는 이상 북한과 지속적으로 전략적 연대를 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 대한 발언권이 가장 강한 중국이 북한 비핵화에 형식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평화통일의 당사자인 한국 정부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 덮어놓고 한미동맹, 미국 일변도 외교만 강조하면 중국과 대립하고 되고 북한 비핵화는 더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일관성 있고 유연한 실용적 대북정책 필요해
Q. 지난 4월 22일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가 개최한 ‘초당적 대북정책 실현을 위한 제언’ 주제 간담회에서 기조발언을 했다. 현장에서 유연하고 실용적인 대북정책을 강조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대북정책 기조는 무엇인가.
“우선 국가안보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북정책은 유연해야 한다. 정치적 상황이나 정권 색채 여부와 무관하게 어떤 경우에도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야 한다. 예컨대 북한이 현재 우리 측의 대화 시도에 일절 호응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코로나19 백신 제공이나 영유아 영양·의료 지원, 농업 비료 지원, 문화예술인, 학생 교류 등의 의제를 접거나,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의식해 남북교류의 끈을 놓아선 안 될 것이다. 남북은 잠시 마찰을 빚더라도, 궁극적으로 평화공존으로 나아가야 할 관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북 전단 살포 등 북한을 자극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 남한 사회 내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너머 사람들에게 그들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알리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특히 집권세력인 여당과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구체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북측은 자신들 내정 문제에 대한 남측의 개입, 평가에 대해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남북기본합의서의 기본정신이자 남북이 약속한 평화공존의 대원칙인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북이 서로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한 데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남북관계가 부침을 겪는 일을 막고자 한 서로의 합의와 존중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마지막으로 민관 고위급 자문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 여야, NGO, 청년-기성세대 등 각계각층이 그리는 평화통일 방안을 망라하는 자문기구를 만들어 정부에 자유롭게 제언해야 한다. 민화협의 기능과 활동을 더욱 적극화할 필요도 있다. 국민적 합의가 바탕이 된 대북정책 기조가 있어야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지속적·일관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Q. 북한 핵무력 고도화가 이어지고 있다. 김정은 총비서 집권 10년이 지났다. 현 김정은 체제 북한의 생존전략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북한은 현재 20개 내지 6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연간 20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고 한다. 이미 북한은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핵무기가 없었으면 북한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어려워져 스스로 붕괴하거나 외부 위협이나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핵무기가 북한 세습 체제의 원동력이자 대미·대남 정책,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치를 결정하는 핵심인 이상 북한은 여건이 되는대로 핵무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보, 개발할 것이다.
이미 북한은 핵 투발 수단인 ICBM, SLBM 발사 성공 이후 7차 핵실험 준비가 완료된 상태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에 따른 위협 때문에 미국은 북한의 ICBM 등 투발 수단을 폐기시키되 핵보유 자체는 사실상 묵인하는 ‘후퇴 타협’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카드로 북미, 북일 수교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데 성공하게 된다.”
북핵에 맞설 수 있는 현실적 옵션 버리지 말아야
Q. 과거 북방정책 추진 시기의 북한은 핵보유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핵무력을 갖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고려할 때 대북정책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북핵문제의 심각성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북한의 핵무력은 우리 국민에게 닥친 직접적인 문제다. 북한이 실제적인 핵보유 국가가 된 이상 앞으로 북핵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우리의 핵 억제력을 가져야 할 필요성도 높아질 것이다. 종국엔 일본, 대만 등이 북핵에 맞서 연쇄적 핵무장을 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의 대북 비핵화 정책은 북핵에 맞설 수 있는 핵 억제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Q. 그렇다면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주장해 왔다. 이전처럼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들여와 북핵에 상응하는 억제력을 갖추거나, 자체적인 핵무장을 통해 자주적인 억제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의 핵무장 핵심은 스스로 억제력을 갖추는 데 있다. 미국의 확장억제만 믿고 북핵 위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더불어 자체적인 핵무장이나 무장 의지를 지렛대 삼아 안보 이익을 얻어낼 수도 있다.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교환 이후 한국전쟁을 가능한 빨리 종결하려는 미국을 상대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휴전협상 주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선언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이 동맹국 내 주둔군 철수, 감축 움직임을 보이자 미군이 철수하면 적화통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핵개발을 시도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핵개발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한미연합사령부가 설치돼 미군을 한반도에 계속 묶어둘 수 있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