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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인터넷신문(PRESSIAN 인터뷰 / 2003. 10. 2)

대북밀사때 극우, 미일 견제 심했다”


박철언 전장관 인터뷰 -인터넷신문 pressian



현재 격변기의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함께 힘과 지혜를 마련해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구해우의 한반도 워치에서는 인터뷰 1회, 2회에서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 YS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에 이어 박철언 전 장관을 통해 5공, 6공 시기의 대북정책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박철언 전 장관은 5공때 안기부 특보, 6공때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대북정책에 핵심적으로 관여하였다. 특히 91년 채택된 남북합의서는 박철언 전 장관의 기획과 협상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필자가 만난 북한의 고위인사들 역시 박철언 전 장관의 통일문제에 대한 식견과 협상력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DJ 햇볕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나 좀더 잘 할 수 있었다"

박철언 전 장관은 30일 박 전 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복지통일연구소에서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갖고 "DJ의 햇볕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나 좀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고 말했다.

박 전 장관은 "햇볕정책은 그 기조에 있어서 대북포용정책을 쓴 것이고 이는 아주 불가피한 선택이며 일관된 흐름을 보인 것은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라면서 "6공화국 당시 북한과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맏형론과 어머니론을 얘기했는데 이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대북포용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바로 이런 6공화국의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좀더 잘 할 수 있었으나 그러하지 못했다"고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이었다. "DJ 정권은 북한에게 너무 끌려 다녔고 단기적인 성과 홍보에만 급급, 민족통일문제를 국민적 합의하에 투명하게 당당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한 부정적이 측면이 있다"고 말하면서 "엄격한 상호주의가 아닌 포괄적 상호주의 정도는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전 장관은 이어 5,6공 시대 북한과의 42차례에 걸친 비밀접촉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던 일화를 소개하며 "나는 유서를 가장 많이 쓴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비공개 비밀접촉은 성격상 엄중한 보안이 유지돼 서로의 생각을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논의도 진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그 당시 북측지역은 신변보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에 북에 갈 때마다 유서를 써두고 가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박 전 장관은 "88년 임수경 양이 평양축전에 참석할 당시, 나도 거기에 있었다"고 밝혔다. "비밀접촉을 통해 서로 신뢰감을 쌓다 보니 상호 초청을 하기도 했는데 북측은 나를 88년 평양축전에 초대해 북한에 갔는데 그때가 바로 임수경양이 북한에 입북해 남북간 상당한 문제가 됐던 시기"라고 말했다.

"개발발전세력과 민주투쟁세력간 더 이상 편 가르기 해선 안돼"

한편 박 전 장관은 "비밀접촉 수행 과정 중 극우보수세력의 반발과 미일의 견제가 심했다"고 털어놨다. "1985년 가을, 평양을 방문해서 사실상 남북정상회담을 거의 성사시키고 돌아오니까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대통령이 평양까지 가서 정상회담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가 나오기도 했다"면서 "고 정주영 회장의 금강산 개발 사업은 그당시 다 합의했던 것인데 보수층의 반발로 사실상 10년이상 미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과 일본은 남북의 비밀접촉과정에서 소외되는 과정에서의 위기감으로 우리 측의 동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상당히 많이 가해졌다"고 밝혔다. "그 당시만 해도 청와대에서 중요 회의나 장관 회의를 해도 10분 내에 모두 미측에 보고가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 자신만이라도 민족문제에 있어서는 자주적 자세를 견지하고 싶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북한과의 비밀접촉에서 북한 측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완곡하게 거론하고 나왔으나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미국의 세계전략상 일본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해 주한미군 철수가 결코 북한과 남한에 득될 것이 없다고 설득했다"고 말하면서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어 북한 지도부에 대한 평가에 대해선 박 전장관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북측지도부는 서방에 알려진 것보다 세계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고 판단력도 상당히 정확한 편이고 특히 북한의 최고 지도자그룹은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다"고 강조했다. "특히 통일문제나 대남문제를 다루는 북측 인사들은 이 문제와 관련한 세계정세에 밝은 편이고 논리적 이념적으로 잘 무장돼 있으며 전문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첨예한 문제인 북핵문제에 관련해서는 박 전 장관은 일괄타결 방식을 주장하면서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공존 교류협력의 확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이 추진한 북방정책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반쪽짜리 외교에서 전방위 외교로 나아가기 위한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접근이었다"고 평가하면서 88년 자신이 초안을 잡은 "7.7 선언이 바로 그 출발선상이었다"고 말했다.

끝으로 박 전 장관은 오늘날 국민간 이념적 갈등에 대해 우려하면서 대북정책 추진과정에서 좌우 이념갈등을 극복하려면 "개발발전세력과 민주세력간에 더 이상 편가르기가 아니라 대화합 대통합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전 장관은 "개발발전세력과 민주투쟁세력간에 정통성을 두고 끊임없이 흑백논리적인 이념적 대결을 해오면서 우리 현대사가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져 왔다"고 하면서 "이제는 이 양대 세력이 서로 현대사에 있어 공과 몫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대타협을 해서 미래를 설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유서를 가장 많이 쓴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


프레시안 : 91년 채택된 남북합의서의 핵심내용과 의의를 소개해 달라.

박철언 :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까지의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5,6공의 대북정책 흐름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5공화국 때에는 1982년 1월 22일에 전두환대통령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안했으나 1983년 10월에 아웅산폭탄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전쟁일보직전의 긴장상태가 조성된다. 그래서 이래서는 민족간에 갈등과 소모가 격화되고 미래가 어둡지 않느냐는 생각에 남북정상회담 및 이를 위한 비밀접촉의 필요성이 우리 측에 의해 제기됐다.

비밀접촉창구를 뚫어서 첫 접촉을 시작한 것이 1985년 7월이다. 우리 남측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전권을 위임받은 비밀특사로 내가 임명되고 북측에서는 한시해 대표가 김일성주석의 전권을 위임받아 첫 접촉을 시작한 이래 1991년 체육청소년부장관을 그만두기까지 도합 42차례 이루어졌다.

1988년 2월 25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이 출발함으로써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이른바 북방정책, 과거의 자본주의 나라만을 상대로 하는 반쪽외교로부터 이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전방위 세계외교시대를 열어나가는 북방정책이 시작된다.

그 출발점으로 1988년 7월 7일 노태우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게 된다. 여기에 대해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공산권 미수교국과 수교를 위한 비밀접촉이 활발히 전개된다. 1988년 강영훈 총리가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의하고 그 후 8차례 예비회담을 거쳐서 고위급 회담이 시작되고 89년 9월 11일에는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 6공화국의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의하게 된다. 1991년 10월 4차회담에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이른바 남북기본합의서가 합의되고 1991년 12월 13일에 양측 총리간 이것이 서명되고 1992년 2월 19일자로 발효된다.

말하자면 과거의 7.4남북공동성명이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합의에 불과했다면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간에 서로의 기본입장의 차이를 서로 터놓고 진지한 장기간의 토의를 거쳐서 ,특히 42차례의 비밀접촉을 통해서 ,또 공개회담시의 양측 대표들의 상호토의를 통해서 논의된 분단사에 있어 최초이자 최고의 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밀접촉을 할 당시 교류협력증진을 위한 방안과 불가침과 남북의 평화통일방안에 관해 우리의 안과 북한의 안, 두 문건을 교환해서 이것을 처음부터 토의해 들어갔다. 이 비밀접촉에서는 서로의 기본 시각에 관한 쟁점의 정리와 그때그때 남북 관계의 주요 현안에 대한 토의를 하게 된다. 그것이 모태가 돼, 공개토의 형식을 거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남북간의 비밀접촉이 막후에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은 어느 정도 짐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기본합의서가 채택될 당시만 하더라도 엄중한 보안 하에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상태에서 진행되었기에 공개회담 당사자들은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이고 접촉사실 자체도 확인할 길 없는 상황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서문이 있고 남북화해 1장 ,불가침 2장, 교류협력 3장, 수정 발효 4장 등 4장 25조로 구성돼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관계를 통일과정의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남북이 당장 통일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해서 서로 상대방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 전복하지 않고 교류협력을 확산시켜 나가는 것을 통해서 민족동질성을 회복하고 단계적으로 통일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약속을 내외에 천명하게 된 것이다.

의미를 부연 설명한다면 72년 7.4공동성명이 남북간의 불신과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한 필요성을 제기하는 선언적인 의미가 컸던 반면 남북기본합의서는 1985년부터 남북간의 42차례에 걸친 남북간의 비공개 접촉, 수 십 차례의 공개회담을 통해서 남북이 민족통합을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점을 위한 준거 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분단사의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7.4 공동성명에서는 민족자결원칙, 당사자주의원칙 등을 얘기했는데 남북기본합의서는 이를 고수하면서 남북간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화해협력 바탕에서 평화통일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실현 가능한 로드맵을 남북간에 합의해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통일을 이루기 까지 중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가운데 서로의 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화해공동위원회, 군사공동위원회, 경제공동위원회, 사회문화공동위원회를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또 남북간 긴밀히 연락 하고 협의하기 위해서 판문점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92년 11월에 예정되었던 분야별 공동위원회 개최가 그 당시 우리 측의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북한의 중지 요구 등으로 무산된다, 특히 1993년에 북한이 NPT를 탈퇴한 이후에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합의서 내용이 거의 무용지물이 되다 시피 한다. 남북 연락사무소는 92년 9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에 설치됐지만 96년 북한 잠수정의 강릉침투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그 해 11월 북한이 일방적으로 연락사무소를 폐쇄했다.

그 이후에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시의 남북공동성명 등 남북 화해 무드로 2000년 8월 14일에 이 남북연락사무소 업무가 복원되고 그때부터 다시 남북기본합의서의 합의사항에 대한 복원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 현주소다.

"88년 임수경양이 평양축전 참석할 당시, 나도 거기에 있었다"


프레시안 : 당시 남북협상을 직접 주도하는 과정에서 핵심쟁점이나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박철언 : 사실 공개회담과 비밀접촉은 그 성격상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공개회담에서는 때로는 명분에 집착해서 홍보적인 발언을 해 난관과 갈등에 부닥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북한으로서는 내부와 맹방의 눈치를 보고 우리로서는 우방인 미국 등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자존심을 챙기고 하다 보니 실질적 성과가 없는 것이 우리 공개회담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비공개 접촉에서는 성격상 엄중한 보안이 유지되고 합의사항을 발표하는 것도 아니기에 서로의 생각을 깊이 이해 할 수 있고 서로의 시각 차이도 분명히 알 수 있어 논의도 진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신변보장이 안되는 북측지역에서의 비밀회담은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유서를 써두고 가야 했다. 아마 내가 유서를 가장 많이 쓴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하는 동안 인간적인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심한 논쟁도 하고 격론도 벌이다가 나중에는 서로 가족사를 얘기하고 인생 시각도 얘기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얘기했다. 그래서 서로 지역에 없는 것에 대한 조그마한 선물도 하게 됐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없는 것, 북측에서는 국어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사업들이 평소 상당히 진전돼 있었다. 그래서 번역본 같은 것을 많이 얻었고 북측에는 필요한 물품 등을 선물했다. 아이가 영어를 배우면 영어 테이프라든지, 스케이트를 배우면 사이즈에 맞는 스케이트를 선물했고 안경 등도 선물로 줬다. 이렇게 인간적인 신뢰가 쌓이면 또 자기들 입장의 어려움도 털어놔 대화가 진전됐다. 분단사에서 이렇게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 수 있는 기회는 그때까지도 없었고 그 후에도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제야 공개하지만 88년 평양축전을 초대받아 참관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임수경 양이 북한을 방문하던 그 때다. 이외에 핵심쟁점을 털어놓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민족간 아직도 분단 극복을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고 계속해야 하는 마당에 있어서 당시에 실무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이 미해결의 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민족문제, 미래적인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문제를 다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밀접촉 수행 과정 중 극우보수세력의 반발과 미일의 견제가 심했다"

비밀접촉을 수행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극우 보수 세력의 반발과 미일 등의 견제로 인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예를 들면 1985년 가을 평양을 방문해서 사실상 남북정상회담을 거의 성사시키고 돌아오니까 우리 남측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어져 있었다. 안기부나 군부나 미국 측은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대통령이 평양까지 가서 정상회담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가 강하게 제기되면서 실무책임자인 나보고 이 정상회담 성사를 조금 늦추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 반전이 있었다.

또 1988년에는 육사 민병돈 교장이 항명에 가까운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나. 그리고 1989년 고 정주영 회장을 북한에 보내서 거기서 금강산 개발에 관한 합의를 해서 왔는데 보수층의 강한 반발과 견제로 금강산 사업은 사실 한 10년 미루어진 것이다. 그때 사실은 합의가 됐던 것이다 .

한편 미국의 국익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런 미국을 너무 원망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미국도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동북아전략의 틀 속에서 남북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문제를 담당한 이래 미국과의 충분한 사전협의와 교감이 좀 미흡한 가운데 남북간에 직접, 당사자들이 만나서 비밀리에 접촉,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미국이나 일본은 논의에서 제외되는데서 오는 불안 내지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우리 측의 동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굉장히 많이 가해졌었다. 예를 들어 노태우 대통령은 내가 청와대 정책보좌관 시절에 백악관과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여 미국을 방문 하고 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때 헝가리와의 수교가 좀 진전돼 발표되고 대표부 설치를 위한 비밀접촉이 가중되다 보니 미측에서는 나보고 계속 개별적으로 만나자고 요구해 왔는데 내가 거절하니 직접 대통령께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민족문제를 다루는 한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미 대사관 파티에 참석하지도 ,미국의 요인과 만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협조해야할 부분은 정보적인 것은 안기부장, 국무성하고의 관계는 외무장관 등 이런 루트를 통해서 간략한 협조사항을 전달하면 되지, 민족문제를 직접 담당하는 실무책임자가 미국의 고위관계자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것은 민족의 자긍심과 관련되는 문제고 일 추진에도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미국측에서도 오해가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반미주의자가 결코 아니고 현재 국제권력정치 하에서는 친미주의자다. 이 시점에서 반미를 하는 것은 우리 국익에도 도움이 안되고 민족이익하고도 맞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자주자존을 지키는 가운데 친미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 당시만하더라도 여야 모든 지도층과 정치권이 미 대사관에 모임이 있다면 전부 가고 청와대에서 중요 회의나 장관회의를 해도 10분 내에 모두 미측에 보고가 되는 상황에서 나이외에도 밀사로서 평양축전에 참석한 사실 같은 것을 일본 측에서 언론에 슬쩍 흘려 그 사실이 국내에서도 논쟁이 되기도 했다. 그런 것은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남북의 직접적인 비밀 접촉이 빈번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신변의 어려움,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 등도 많았다. 6년여간 마음고생 몸고생이 많았다. 그런 여러 가지 비사는 민족이 통일되면 공개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자신만이라도 자세를 지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북측지도부는 서방에 알려진 것보다 세계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어"


프레시안 : 6.15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울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 등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평 등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접촉을 해본 당사자로서 김정일 등 북한 지도자들에 평을 한다면 어떠한가.

박철언 : 85년부터 91년까지는 북한이 김일성주석 아래의 시대였기에 김일성 주석하고는 직접 대화도 하고 술도 마시고 식사도 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에는 표면에 그리 나타나지 않았다. 행사시에나 여러 사람과 같이 인사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정확한 느낌은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김일성 주석을 비롯해서 이종옥 부주석이나 허담 비서, 한시해 수석대표나 요즘 북측대표로 많이 나오는 인사들은 그 당시 참모였기에 어느 정도 안다. 그 사람들은 서방에 알려진 것보다는 세계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판단력도 상당히 정확한 편이고 특히 북한의 최고 지도자그룹은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다. 상당히 감성적인 측면도 강하다. 나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보고 있다.

특히 북한 지도부 인사들은 논리적, 이념적으로 잘 무장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언제나 받았다. 통일문제나 대남문제를 다루는 북측 인사들은 평생을 두고 이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문제와 관련된 세계정세에 대해서 매우 밝은 편이다. 전문성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대다수 북한 지도부는 6.25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보니 미국의 공격가능성에 대해 민감하게 신경을 많이 쓰는 느낌을 받았다.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공존 교류협력의 확대로 나아가야"


프레시안 : 6공의 북방정책과 대북정책을 직접 주도한 당사자로서 과거 6공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말해 달라. 특히 6공의 세계사적인 배경이 탈냉전이 실질화되는 시기였는데 이와 관련해 밝혀 달라.

박철언 : 우리가 살아왔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19세기말에는 격동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당파싸움, 쇄국정책에 연연하다가 결국 우리는 나라를 잃고 36년간 치욕적인 일제강점시기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20세기 말에 이르면서 세계가 다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감지하면서 살아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우리는 분단된 조국 남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굉장히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북간에 있어서는 아웅산 폭탄사건이 일어났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을 완화해 서로 신뢰를 회복하고 평화공존을 하면서 평화통일의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밀접촉을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시작했다. 이는 내가 적극적으로 주장을 했다. 안기부 특보로 간 게 85년 3월이었는데 첫 비밀 접촉은 85년 7월에 시작했다.

그래서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공존 교류협력의 확대, 이를 통해서 동질성의 회복과 통일기반의 구축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의 후반기에 내가 보니 세계는 냉전체제의 와해로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세계의 반쪽인 서방만의 반쪽외교, 그것도 미국 일본 등 강대국의 치마폭 아래서의 외교였다. 공산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수교를 해서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세계외교 ,자주자존 외교시대를 여는데 우리 민족의 내일이 있다는 그런 판단에서 북방정책을 시작하게 된다.

제일 처음은 1985년 7월에 안기부내 특보로 가면서 조그마하게 남북문제팀을 만든 것이다. 전 대통령과 장세동 부장에게 말해서 북방정책 실무팀을 거기서 만들었다. 그래서 각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특별보좌관아래에 모아서 북방정책팀을 만들어 준비, 노태우시대가 열리면서 소신껏 이 정책을 펼치게 된 것이다 .

실제로 첫 작품은 1988년 7월 7일의 특별선언이다 .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다. 어떻게 보면 햇볕정책, 대북포용정책의 뼈대가 여기에 다 있다. 북방정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앞서 말했던 세계외교를 해야겠다는 것이 그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북을 개방과 변화로 유도해서 우리와 평화공존하고 평화통일로 나가게 하려면 북한의 맹방인 중국, 소련, 헝가리, 체코 등 모든 공산권과 친구가 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세 번째는 이렇게 북한의 맹방과 친구가 되고 또 남북관계도 전향적으로 나가면 남북의 경제에 있어서도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생산용지와 잘 훈련된 값싼 노동 이것이 잘 결합하면 남북경제가 새로운 폭발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로 우리도 그동안 전쟁을 겪고 가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우리도 북방정책을 통해서 못사는 공산권도 좀 도와주고 인류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가 북방정책의 기본 철학이었다.

이 추진의 체계적인 출발이 1888년의 7.7 선언이다. 그래서 6공화국 이전의 북방정책이나 대북정책이 북한과의 직접 내지 간접적인 접촉에 착안한, 단면 단편적인 접근 방식이었다면 6공화국의 정책은 남북간의 당사자주의에 입각한 직접대화를 지속하는 가운데 동구권과 전부 국교를 정상화하고 또 북한이 우리의 우방인 미국 일본과도 관계정상화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민족 통합을 성취해 간다는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접근이었다.

7.7 특별선언에 보면 이미 우리는 북한이 미국 일본과 관계 개선하는 것을 협조하겠고 우리도 중국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친구의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 다 담겨 있다. 국제정치의 대변혁기였기 때문에 이런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능동적 적극적인 대처를 통해서 민족이익을 극대화해야겠다는 관점에서 헝가리와의 관계개선 수교를 필두로 1991년 9월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졌다.

북방정책은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남북한이 다 역량을 강화해서 장차 동질성을 회복, 평화통일로 나가는 것이 우리 민족이익에 부합하고 세계 흐름과도 맞닿는다는 원대한 구상 하에서 6공의 북방 대북정책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 철수하면 일본 역할 확대돼 한반도에 득되지 않아"


프레시안 :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하다보면 핵심적이고 민감한 문제가 주한미군 문제다. 여러 가지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6.15정상회담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6공화국 시기 북한과의 접촉에서도 주한미군 관련해서 논의가 있었나.

박철언 : 북한은 주한미군 문제를 처음에는 완곡하게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한반도 한민족의 미래를 단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의 전략과 중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전략은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얘기하면 지금 세계가 미국이라는 특정국 일방주의 패권주의로 나가는 것은 인류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나라가 모든 질서를 주도하고 일종의 경찰권을 행사하는 것은 공동선의 추구라는 인류의 목표 즉 자유, 평화, 복지, 인권, 평등 등의 인류적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오래 지속되면 바람직하지 않다. 다원주의가 세계를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조화로운 발전을 가능케 한다고 본다면 결국 미국과 내실화된 EU, 연대를 형성한 동북아 세 나라가 세계 질서에서 주도적인 발언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남북이 평화공존, 평화통일 되어야 하고 중국과 일본 관계가 좋아져야 하고 균형자 역할을 우리 한반도가 해 나갈 때 한반도가 세계사에 있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5년 이내의 단기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지금 세계권력정치에서 보면 막강한 미국과 맞선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고 국가이익과 상반되는 일이다. 친미를 하면서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미국을 설득하고 대화하고 해 나가야 한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두 가지 기둥은 중국이 정치경제군사대국화해서 장차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게 하면서 아시아에 있어서 일정한 군사 역할을 주면서도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중국, 일본, 한반도를 서로 분리 통제함으로써 미국은 지속적인 세계 패권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주한미군 관련해 대화하면서 앞으로 5,6년간 당분간은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한반도, 중국, 일본이 서로 연대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여기에 일본 등의 독무대가 되면 우리한테 좋을 게 뭐가 있느냐 ,중국으로 봐서도 그리 좋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미국 역할까지 하게 되면 동아시아의 군비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중국으로서는 앞으로 10여년간 군비경쟁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최대의 목표로, 경제를 살려서 중진국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두고 있기에 군비경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이 핵을 가지는 것도 원치 않고 일본이 군사대국화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중국의 국가이익이라고 생각한다.

"햇볕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 받을만 하나 좀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


프레시안 :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를 해 달라.

박철언 : 그 당시 나는 맏형론과 어머니론을 얘기했다. 우리가 사정이 더 나으니까 맏형같은 심정으로 어머니같은 심정으로 북을 포용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한 것이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대북포용정책이다. 햇볕정책이란 용어자체에 대해서는 북한이 싫어하기도 해서 그리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음지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조에 있어서 대북포용정책을 쓴 것은 아주 불가피한 선택이고 일관된 흐름으로 왔다는 것은 평가를 받을만하다고 본다.

YS 시대에는 냉온탕을 왔다갔다해서 남북관계가 엉망진창 됐지만 DJ 시대는 6공화국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해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아래서 일관되게 추진해 왔는데 이는 총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하고 또 상당한 가시적인 진전도 있었는데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간의 교류협력의 증대 등은 평가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잘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DJ 시대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것이 DJ 정권이 북한을 잘 설득해서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이는 너무 오만한 생각이다. 우리 국민들이 정부가 현대사에서 함께 노력해서 우리가 외교 경제력으로 북한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어서 또 북한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나 서방과 관계개선을 하지 않고는 체제유지가 어려워진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DJ 정권은 북한에게 너무 끌려 다녔고 너무 단기적인 성과 홍보에 급급, 민족통일문제를 국민적 합의하에 투명하게 당당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한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엄격한 상호주의 등의 너무 극우적인 특정 야당 시각은 무리가 있어서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으나 포괄적인 상호주의 등은 지켜가야 한다.

"북핵문제 해결은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야"


프레시안 : 현정부 북핵문제 해법과 6자회담의 평가를 말해 달라.

박철언 : 북한 핵문제 관련해서는 지난 7월 31일에 부산 시민포럼 초청을 받아 ꡐ북핵 , 미국은 북한을 선제공격할 것인가ꡑ 이런 제목으로 토론한 적이 있다. 6자회담이라는 것은 남북이 처음으로 민족문제 관련 테이블에 공식적으로 함께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김영삼 정권때는 북핵협상 테이블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비용부담만 해야 했고 남북문제는 경색됐었다.

북핵문제는 남북간의 문제이자 주변 4강과 밀접히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한반도 통일 문제도 주변 4강의 보장과 영향력을 결코 우리가 경시할 수 없다. 때문에 6자회담 형식으로 시작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향후 성공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순수한 열정은 참 좋은데 준비가 덜 돼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움이 많다. 기본적인 구도를 가지고 이게 이루어지도록 끈질기게 인내하고 노력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순수한 열정만 가지고 그때그때 감상주의적인 말과 행동을 하다보니 지금 미국과의 관계도 조금 묘해지고 일본, 중국, 러시아 4강관계가 어려운 시점에 있다.

북한의 최고 목표는 핵보유국선언으로 핵실험 핵무기 개발 증강의 길을 확보하고 김정일 체제도 보장받고 대대적인 경제보상도 받는 것 등이다. 반면 최소 목표는 김정일 체제를 보장받고 경제지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북한의 기본 시각은 미국의 선제공격은 한반도 전쟁참화로 연결될 것이기에 남한이 절대 반대할 것이고 종국적으로 미국이 승리하게 되면 북한에 친미정권이 들어서게 돼 중국 국익에 반하기 때문에 중국도 미국의 선제공격에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상당한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미국이 선제공격을 못할 것이라는 시각에서 벼랑끝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정책의 기본 방향은 그대로 지키면서 즉, 장차 미국의 패권이 중국이 도전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게하고 계속 미국의 핵우산 하에 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최고 목표는 북한의 핵을 영구 파괴하고 친미적인 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최소목표는 북한 핵을 검증가능하고 번복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의 최고목표 최소목표는 바로 이런 것인데 이를 안다면 북한이 결국 종국적으로 구석으로 몰리면 전쟁을 일으킨다는 우려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자세는 미국측에 대해서 대북비타협 강경책보다는 북한과 협상을 하는 것이 비교우위에 있다는 것을 조용하게 집중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대선을 앞둔 부시의 체면을 생각해주어야 한다. 미국을 건드리는 얘기를 해선 우리에게 득될 게 없다. 또 미국 일본과 외부적으로는 압력과 협상을 병행하는 전략을 써야지 북한도 한계에 와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최소한의 요구에 만족할 것이다. 철저히 한목소리로 공동전략을 내세워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익과 정서사이에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말 사이에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말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미국의 강경일변도를 설득해 일괄타결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미국의 선핵포기 철저한 검증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은 어렵고 북한의 단계별 동시이행의 원칙도 미국측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과 북한이 동시에 양보를 해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발발전세력과 민주세력간에 대화합 대통합 조치가 있어야"


프레시안 : 통일문제가 진보진영의 독점적인 권리라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돼 있고 보수진영은 통일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비추어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대북정책 추진과정에서 좌우 이념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박철언 :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권력담당자들의 원인제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평화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자꾸 편 가르기를 해서 흑백논리적인 대결구도로 몰아가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들이 좌우이념대결이 격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책임이 상당하다고 본다.

우선 우리 현대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개발발전세력, 이른바 보수 세력과 YS ,DJ, 노무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민주투쟁세력간에 정통성을 두고 끊임없이 흑백논리적인 이념적 대결을 해오면서 우리 현대사가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져왔다고 본다.

이제는 이 양대 세력이 서로 현대사에 있어 공과 몫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대타협을 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악수하는 가운데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 선진복지통일시대를 함께 손잡고 열어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빵문제, 근대화문제에 기여하고 민주화문제에 기여한 사람들이 모두 서로 공과 몫을 인정해야 한다.

노무현정권에 대해서는 편향적인 시각으로 인해 보수층에서는 이 정권이 좌경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의식, 피해의식을 갖고서 시민세력에 대해서 적대감, 위기감을 갖고 뭉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민세력은 다시 보수층에 대해 적대시하고 일촉즉발의 대결구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세력이나 한민족이 화해하고 평화통일로 나가자는데 반대하는 세력은 없다. 수구반동세력이 따로 있고 평화통일 세력이 따로 있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도층이 가져선 안 된다. 생각은 다들 비슷하다. 다만 서로가 처한 입장의 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키는 대통령이 쥐고 있다. 전체국민을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편가르기는 이제는 해서는 안 된다. 남남간에, 남북간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프레시안을 보는 사람들은 젊은 층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더욱 프레시안이 화합과 통합의 방향으로 가는데 기여해주길 바란다.

-- 구해우/프레시안 편집위원 --


 
       

 인터넷신문(PRESSIAN 인터뷰 / 2003. 10. 2)      관리자 2008/09/02 4680  
2  북핵, 미국은 북한을 선제공격할 것인가" 부산포럼초청 시민강좌 특강(2003. 7. 31)      관리자 2008/09/02 4990  
1  지금은 대북 밀사가 필요한 시기(월간 말지 / 2001.12)      관리자 2008/09/02 6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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