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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박철언 권력 심장부 증언-월간조선 1997년 2월호
이 자료는 박철언의원(자민련부총재)이 1997년 1월 11일 장장 8시간에 걸쳐 신변의 위험에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권력심장부의 비사, 대북정책의 기막힌 사연 등 역사의 진실을 밝힌『월간조선』과의 독점인터뷰(97년 2월호)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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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의원과 언론매체와의 관계는 지금껏 썩 유쾌한 편만은 아니다. 황태자로 불리던 시절, 그의 차갑고 권력적인 이미지가 상당수 언론인들로 하여금 적의를 품게 했는지도 모른다. 언론이 늘 자신을 손해보게 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기자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한때 정권을 세워 그 정권을 자신의 디자인에 따라 이끌어갔다. 중간평가를 무위로 돌리고 3당통합을 막후에서 성사 시켰는가 하면, 나라의 명운을 건 대북밀사로서 한판 승부를 벌였고 북방정책을 수행했다. 화려하다면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다. 굳이 그를 편든다면 그의 이미지가 일방적으로 그의 경력을 눌러왔다는 점이 아쉽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주제넘는 짓으로, 지금부터 그가 처음 털어놓는 5공과 6공의 권력심장부에 대한 증언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오전 9시 반 인터뷰는 시작됐다. 그 중간에 음식점에서 배달된 점심을 먹는 데 걸린 20분과 화장실 한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 인터뷰는 마라톤 하듯이 계속됐다. 날이 어둑해져 인터뷰가 끝났을 때의 시계는 오후 5시반을 가리켰다. 대략 8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말하는 쪽인 그는 물론 듣는 쪽인 기자도 시간의 흐름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권력 게임

요즘 정치판에서 떠도는 DJ와 JP의 연합을 인터뷰의 머리말로 꺼냈는데, 그는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야권 공조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러한 야권공조에서 그가 물밑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언론에 보도된 상태다. 기자는 『DJ와 JP의 조합은 어울릴 수도 있고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귀추는 두고볼 일입니다. 하기야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상황도 그랬습니다. 그때는 이보다 훨씬 충격적인 3당합당이 이뤄졌으니까요』라고 짧게 소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의도한 대로 그는 과거 권력의 과면사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6공 출범당시 바깥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부터 말하는게 순서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6공은 1988년 2월 25일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출범하는 과정에서 저는 엄청난 견제를 받았습니다. 7인의 취임준비위원회는「박철언은 강경파고 노대통령과 인척간이므로 청와대에 들어오면 안된다」는 입장이었어요. 대통령은 저를 곁에 두고 싶어했고, 이들은 저를 제거하려고 했어요.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인해, 유독 저만 발령이 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도 마음대로 못한 거지요. 정부 출범 10일 뒤인 3월6일에야 비로소 정책보좌관으로 발령났어요』

- 당시, 갈등은 박의원이 청와대 비서실에 별도로「정책실」이라는 기구를 만들겠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 경우 정책실이 권력을 독점하는 반면 기존의 비서실은 단순히 의전기구로 무력화될 게 명백하므로 취임준비위원회에서 박의원을 견제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일부 신문에 보도된 것인데 권력의 내부 움직임과는 다릅니다. 6공 초기 과정이 굉장히 왜곡되어 있어요. 제가 직책상 언론과 거리가 있거나 혹은 정치적 이유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들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통설이 됐어요. 실제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대선에 승리한 직후 권력 내부에서는 게임이 시작됐어요. 취임준비위원회 멤버들이 박철언을 제거하느냐 마느냐는 게임이었지요. 노대통령은 저를 곁에 둬야 안심이 된다는 쪽이었어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반대했다고 그럽니다. (최병렬씨가 정무수석으로 발탁됨-注) 그 다음에는 민정수석을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신문에도 사진이 났지만, 삼청동 안가에서 노태우 대통령당선자, 이현재 총리 내정자, 홍성철 비서실장 내정자, 이춘구 취임준비위원장 등 4명이 인선작업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합의된 게 민정수석 자리였습니다. 이건 비사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6공 정부의 인선안을 연희동에서 가져 갔어요. 현직인 전대통령에게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밟았던 거지요. 그런데 전대통령측이 저를 매우 오해하고 있었어요. 처삼촌인 이규광과 형인 전기환을 구속했을 때 제가 관련 됐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를 민정수석에 앉혔다가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칼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오해에서 비토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노대통령이「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분야에서 나를 도울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했습니다. 안기부에서부터 함께 일해온 강재섭의원 등과 협의해, 「정책실」이라는 일종의 연구실을 설치하는 안을 내놓은 겁니다. 비서실이나 경호실 같은 규모의 기구는 아니었어요. 당시 뒤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게 되는 정책실을 맡는다고 하니까, 우리 팀에서 그동안 음지에서 일했으면 이제 양지에 나와서 일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발도 있었어요. 하여튼 정책실에 대한 안건을 올렸는데, 의전수석인 이병기(현 안기부2차장)가 그걸 취임준비위에 보였어요. 그걸 취임준비위에서 오해하고 확대했던 겁니다. 정책실안이 반발에 부딪치자, 노대통령은 직책의 이름을 바꿔「정책보좌관」으로 임명했어요. 이번에는 전대통령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럴 수가…』

- 청와대 정책보좌관에 발탁이 된 뒤로 박의원이 권력 게임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해 독주한 것으로 압니다. 세간에서는 6공 황태자라는 말도 회자됐지요.
『그것도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정부 출범 직후 첫 총선(1988년 4월 26일)을 치르게 됐는데도 총선대책 당정회의의 멤버에 저를 넣지 않았어요. 7인의 취임준비위가「박보좌관이 개입하면 대중적 이미지도 나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사조직인 월계수회의 활동이 민정당의 공적인 활동과 상충되는 측면이 있었다. 박보좌관을 2선에 물러앉힌 채 총선을 치르는 게 유리하다. 더욱이 이번 총선에는 압승이 예상된다」는 것이었어요. 모든 참모들이 낙관한 4․26총선을 저는 몹시 불안하게 봤습니다. 사조직인 월계수회에서 올라오는 정보에 의하면 낙관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과반수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투표 사흘 전에 노대통령에게 보고드렸어요. 하지만 노대통령은「무슨 소리냐. 걱정마라. 안기부의 보고도 압승이고, 경찰의 보고도 압승이고, 당의 보고도 압승이다. 자네가 너무 걱정 많다」라고 했어요. 투표 당일에도「만일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날 저녁 대원각에서 청와대 비서실팀이 식사를 했는데, 거의 동시에 시작된 개표에서 우려할 만한 조짐이 나타났어요. 결과는 여소야대의 참패였어요. 그날 정무수석, 당대표, 사무총장, 안기부장 등 선거대책 수뇌부가 사표를 냈습니다. 노대통령은 제게「이 사람들이 이럴수가, 나한테 그러더니…. 이 사람들이 사의를 표명해 왔는데 내가 일단 만류했다」라고 했어요. 저는「지금 정무수석만한 사람이 어딨습니까. 안기부장도 금방 어떻게 할 수 없고. 당의 진용은 모양상 바꿀 필요는 있을지 모르지만」이라고 변호했어요. 되돌아보면 그때 새로운 진용을 갖췄으면 6공이 그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박보좌관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4․26총선이후로 제가 급부상하게 됐습니다. 제가 보수와 혁신 구도의 정계개편 구상을 내놓은 게 바로 총선 패배 후 독대한 자리에서였지요』

『집어치워라』

- 3당합당이 박의원의 작품이었다는 뜻입니까.
『저는 노대통령께 「총선 패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겠다. 21세기를 준비하고 역사에 평가받는 6공이 되려면 정계 대개편을 해야 한다. 보수와 혁신의 구도로 개편해야 하고 그것이 안되면 개현이 가능하도록 3분의 2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하자, 이분은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느냐. 집어치워라」라고 언짢아했습니다. 하지만 노대통령으로서도 달리 선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대중 총재와도 부단히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경위로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과의 통합이 이뤄졌습니까.
『당초 3당통합의 구상은 아니었지요. 보수대 혁신의 구도로 정계개편을 구상했으므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총재 모두와 접촉했습니다. 그럴 즈음 홍성철 비서실장, 노재봉 특보 등이 「공화당과의 통합만 해도 과반수가 넘으니 더 이상 시일을 끌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홍실장이 JP와의 교섭을 끝마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공화당과의 통합만은 의미가 없다. 국민이 대화합하고 21세기를 대비한 내각제로 가기 위해서는, 민주투쟁세력과 발전주도 세력과의 역사적인 대화합을 해야 한다. 공화당과의 통합은 자칫 권력 유지의 야합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노대통령이 중간 중간 많이 흔들렸어요. 저는「대화가 진행중이니까 시간을 좀더 달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인 89년 7월19일 정무장관으로 옮겨갔습니다. 청와대 안에서 저를 견제한 세력이「일선 장관의 경력을 쌓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 정무장관이라는 직책이 정계개편을 위해 막후 접촉을 하는 데 유리했지요. 협상과정에서 평민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김대중 총재의 일관된 입장때문이었어요. 그는「국가 운명의 큰 틀에서는 협조하겠지만 야당을 버리기는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평민당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처음 밝히지만, 3당합당(90년1월22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이나 공화당에서는 3당통합인 줄 몰랐습니다. 서로 자기네끼리만의 통합, 말하자면 양당통합인 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별도로 접촉하고 보안을 유지했던 까닭입니다. 당초의 구상은 1월22일 청와대에서 노대통령이 김영삼 총재와 회동해, 「나라의 현상에 대한 고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한 끝에 통합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합의하고, 시간차를 두고 오후쯤 김종필 총재를 들어오게 해 그 자리에서 3당통합을 발표하는 모습으로 구상했던 겁니다. 그런데 통합 시점을 앞두고 서로 눈치를 챈 것 같았어요. 상대방에서 「어떻게 된 거야」라고 따져 물었어요. 1월19일 저녁 극비리에 김영삼 총재를 만나「민주당이 당연히 실질적인 주역이지만, 온건 중도세력이 총집결한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공화당쪽에도 의사를 한번 타진하지 않을 수 없다. 공화당이 내각제에 합의한다면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더라도 양해해 줬으면 좋겠다. 프라이오리티(Priority)는 민주당에 있다」고 했어요. 김총재는 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그런 걸 끼워넣어 모양이 괜찮겠느냐」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측 입장이 분명하다는 걸 알고「들러리로 끼워 넣는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YS가 먼저 방문한 뒤 시차를 두고 JP가 방문하도록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JP측에서 발칵 뒤집혔어요. 자기들을 들러리로 삼으려는 게 아니냐고 항의해왔어요. 결국 같이 방문하는 걸로 수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3당통합이 이뤄진 것입니다. 발표문안은 제가 준비한 원고를 이수정 대변인이 가필해 다듬었어요』

- 청와대에서 3당합당을 발표한 당일 노대통령과 YS, JP가 내각제에 합의한다는 각서에 서명했던 것입니까.
『발표 당일에는 각서가 없었습니다. 각서는 사흘 전인 1월19일 신라호텔에서 작성됐어요. 구두로 내각제에 합의는 했지만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각서를 쓰자고 했습니다. 당시 마무리 단계에서 협상 멤버가 우리쪽에서는 박준병 사무총장이, YS쪽에서는 황병태, 김덕룡 의원이 보강됐어요. 비밀각서에는 민정당 총재인 노대통령을 대리해 저와 박총장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대신해 김덕룡, 황병태 의원이 서명했어요. 이 비밀각서는 일반에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 각서의 제1항에는「국민대화합과 민주발전 민족통합을 위해 의원내각제로 헌정체제를 바꾸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국의 안정, 중도, 민주, 민족세력이 총결집해 정계개편 돼야하기 때문에 이런 구국적 결단으로 양당이 통합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14대 총선 후 YS가 당 총재』

- 공개되지 않은 각서에는 구체적으로 내각제 합의말고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합당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어요.「내각제 개헌을 13대 국회 종료 전에 반드시 하고, 14대 총선이 끝나면 김영삼 대표가 당총재를 맡는다」라고 못박았어요. 이 비밀각서는 지금도 제가 갖고 있어요. 각서의 서명 문제를 둘러싸고, 처음 YS쪽에서는 꺼렸어요.「각서까지 만들 필요가 있는 거냐. 지키면 되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중대한 역사적 합의이므로 각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며 제가 물러서지 않았어요. 앞서 말한 대로 신라호텔에서 서명이 이뤄졌고, 그 순간 민주당과의 양당통합이 마무리된 겁니다. 공화당쪽으로는 1월 20일 박준병 총장과 김덕룡 총장이 각서에 서명했어요. 이게 3당통합의 정사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모습의 3당통합은 극비에 부쳐졌어요. 이 때문에 3당통합이 발표되자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이를 감지 못한 당 내부로부터 저는 많은 항의를 받았어요』

- YS가 민정당과의 통합에 응한 것은 「14대 총선(1992년 3월24일)후 총재를 맡는다」는 조건 때문이었나요.
『당시 YS로는 대선에서의 패배, 민주당 내부에서의 내홍으로 곤궁한 입장이었습니다. 지금은 독일 병정처럼 충성심을 과시하는 강삼재 의원 등이 당시에는 탈당을 해서 평민당의 소장의원과 신당을 만든다는 설이 연일 보도되곤 했어요. 그러므로 김총재가 구체적으로 조건을 제시할 입장이 아니었어요. 내각제 하에서 총선을 치른 뒤 집권당의 총재로 한다는 조건은 있었지요』

- 90년 당시 3당합당과 관련된 내각제 합의 각서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그 각서는 언제 작성된 것입니까. 3당합당을 하던 날인 1월 22일에는 각서가 없었다고 하셨지요.
『언론에 공개된 각서는 전당대회(90년 5월)를 앞두고 작성된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 1월 19일 서명한 내각제 합의각서를 당초 3당합당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공표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정당한데 YS가 두 가지 이유를 대면서 보안에 부쳐달라는 겁니다. 첫째 이유가「내각제로 합의한다는 것을 핵심참모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므로 바로 발표하면 자신의 입장이 어려워진다. 내부적으로 설명해서 이해를 구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어요. 둘째로는「내각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이 거부반응이나 평민당의 반대 입장이 있는데 이걸 발표하는 것보다 비밀리에 내각제를 추진하는 게 효과적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일이 지날수록 YS는「내각제는 해서는 안되고 합의한 사실이 없다」고 기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3당합당이 있고서 한 달쯤 뒤인 90년 2월 하순경 YS로부터「밤늦게 단둘이 만나자」는 전갈이 왔습니다. YS의 둘째아들인 김현철군 아파트에서 만나 포도주를 마셨는데, 「박장관, 내각제를 꼭 해야 한다고 하는데… 골치 아픈 내각제 집어치웁시다.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평민당에서도 반대하고… 지금 이걸 추진한다면 여러 가지 애로가 많고 국민들도 들고 일어나요. 내각제는 없었던 것으로 집어치우고… 이번에 박장관이 노대통령 보좌하듯이 나를 대통령후보로 도와주면 수월하게 당선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민주계에 특별한 사람이 없지 않느냐, 내가 그동안 박장관을 접촉해 보니 훌륭한 인재고, 노대통령도 기대하는 인물이고 하니까, 다음에 박장관을 화끈하게 밀어주고 하면 모든 게 잘 풀리고 좋은 게 아닌가. 그러니 내각제 집어치우고 노대통령 보좌하듯이 잘 도와주시오」라고 했어요. 구두와 문서로 수없이 약속한 내각제를 하루 아침에 없었던 것으로 하자니 제가 깜짝 놀랐어요.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구나. 제가 애매한 입장을 보이면 내각제가 불가능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김대표님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구국의 결단으로, 내각제를 전제로 우리가 통합을 했는데, 없었던 것으로 하자니 말이 됩니까.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 곳에서 내각제에 대해 반대가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의석의 3분의 2를 가진 상황에서, 평민당은 지방자치제로 명분을 살려줄 수도 있고, 그런 가운데 내각제를 공론화해가면 됩니다」라고 했어요. 이분이 흥분해서「박장관이 되지도 않은 일을 하자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소리쳐요. 그래서「그러면 되지도 않을 일을 왜 약속했습니까」라고 맞받았어요. 이렇게 되니까 서로간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긴 겁니다』

『내가 중간평가를 보류시켰다』

3당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있었다. 이른바 6공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 보류(1989년 3월20일)다. 6공은 정권의 사활이 걸린 대국민 약속인 중간평가의 실시 여부를 두고 고민했던 것이다.

- 총선에 패배한 후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보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박의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가요.
『중간평가를 보류함으로써 6공 정부가 그 뒤로 정국의 주도권에서 수세에 몰렸다는 비난이 당시에도 있었고 요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간평가를 보류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부적으로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중간평가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중간평가는 안된다고 시종일관 밀어붙였어요. 이점에 대해 제가 비난받아도 할 말 없습니다. 당시 취임준비위원회에서는 중간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중간평가를 한다면 나라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에 이른다는 게 제 소신이었습니다』

- 김윤환 의원은 월간조선(1994년 8월호)과 인터뷰에서 「박철언 진영에서 여론조사를 해보니 패배한다는 결론이 나온 게 중간평가를 취소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증언한 적 있습니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정권의 운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까, 중간평가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고 또 이깁니다. 그런 국민투표에서 집권당이 지는 예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무원과 관변단체 등 여권 조직과 자금이 총동원돼야 합니다. 무리한 투표 전략을 강해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그럴 경우 우리가 승리해도 과연 얻는 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중간평가를 받아도 여소야대의 정국이 바뀌는 게 아니고, 야당에서는 오히려 부정, 타락선거에 대한 진상조사 특위를 구성하자고 나올 게 뻔합니다. 청문회, 공청회를 열자고 하겠지요. 그 감당을 누가 할 것인가. 다시 야당과 극렬한 대결의 양상이 예상되고 중간평가 자체가 도마에 올라가면, 6공 정권의 정통성, 도덕성이 기초부터 무너집니다. 당초 노대통령은 중간평가 실시쪽으로 기울여져 있었어요. 저는 이분에게「하면 반드시 이깁니다. 제가 이렇게 반대해도 하는 쪽으로 결론내면, 나름대로 총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전국의 월계수회를 다시 가동했어요. 서울 올림피아호텔에서 월계수회의 거점장들을 모아 교육시켰어요. 그렇게 한 것은 나라를 운영하고 권력을 관리하는 사람의 책임이니까요. 동시에 저는 해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노대통령을 거듭 설득했어요. 노대통령이「중간평가를 연기하면 야당에서 정권 타도하겠다고 덥빌 텐데,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아직은 완전히 공개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당시 중간평가 보류에 대해 야당과 이야기가 된 상태였어요. 김대중 총재에게「중간평가를 하면 나라가 되겠습니까. 집권당이 이깁니다. 그러나 그 후에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식으로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당의 극렬한 저항 없이 중간평가를 유보시켰던 겁니다』

동해(東海) 보궐선거

- 당시 중간평가 유보에 대해 강도를 따지면, 평민당에서는 묵인해주는 입장이었고 민주당은 비난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5공청산 마무리와 중간평가 유보 등 중요한 현안에 대해 DJ와 대화했습니다. 이분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도 받아들일 만하면, 끝까지 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 중간평가를 유보해주는 조건으로 DJ가 거금을 받았다고 보도된 적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DJ와 그런 대화를 몇 번했지만 단 1원도 갖다준 적이 없습니다. 저는 DJ가 노대통령측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밝혔을 때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는 그분의 인격과 달랐으니까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면 YS는 낮과 밤이 차이나는 처신을 많이 했습니다. 낮에는 극렬히 반대를 하다가도 밤에 만나면 대단히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언행을 합니다. 당시 중간평가 보류를 둘러싸고 YS가 끝까지 결사반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대외적으로 DJ가 유연한 입장을 보여준 반면, YS는 강한 톤으로 비판적인 표현을 썼지요. 하지만 내막적으로는 모두 양해하는 쪽이었어요. 어차피 서로간에 깊은 대화가 진행중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 중간평가 보류와 3당통합은 서로 연계되어 있었습니까.
그는『조건부로 이야기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증언을 했다.『사실 동해 보궐선거(1989년 4월), 서석재씨가 상대방 후보를 매수해 사퇴시킨 사건… 짐작하는 이들도 있었겠습니다만, 당시 그 사건을 제대로 파헤쳤으면 상당한 파급 효과가 생겼을 겁니다. 서석재씨에 대해 관대하게 처리하는 방향(보석으로 풀려남-注)으로 매듭지어졌지 않습니까. 민주당에서 낮에는 중간평가 보류에 대해 반대하는 톤을 높였지만… 조용하게 깊은 그런 대화가 있었기 때문에(중간평가 보류가)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 동해 보궐선거에 대한 수사 전모를 완전히 공개했다면 YS까지 관련될 수 있었다는 뜻인가요.
『수사의 전모가 다 공개된 것은 아니었죠. 야당 수뇌부의 입장을 감안한 상태에서 정국 운영과 법 집행이 될 수밖에 없는 당시의 한계도 있었다고 이해하십시오. 사건이 매듭된 마당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해온 부분을 그대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5천만원이라는 매수금의 출처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있었지요』

- 서석재 의원은 몇 년전 정계에 복귀하면서 동해 보궐선거 사건과 관련, 6공 정권으 공작이었다고 한 바 있습니다.
『선거 앞두고 출판기념회에서 회덮밥을 제공했다고 구속된 김현욱의원(자민련)의 잣대를 놓고 보세요. 후보를 사퇴시키기 위해 상당한 자금을 거래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지, 공작 차원의 사건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박장관, 모든 게 끝났어』

- 1990년 3월 민자당 대표인 YS가 박의원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을 때, 두분 사이에서 「동행」이냐「수행」이냐를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인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 적 있었지요.
『김현철군 집에서 YS와 내각제 문제로 서로 사이가 벌어지고 한 달쯤 지난 뒤 이분이 소련을 방문하겠다고 노대통령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소련과의 수교를 위해 비밀협상을 하고 있었고, 5월경 소련의 고위관계자와 비밀협상이 예정돼 있었어요. 그런 중에 노대통령이「김대표가 박장관과 함께 가기를 원한다. 같이 다녀오라」고 설득했어요. 저는 정부의 대표로 함께 가되, 지금껏 추진해온 비밀협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그런데 YS가 왜 박의원과 함께 모스크바를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 그동안 벌어진 관계를 좁혀보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저와 친했던 황병태 의원을 비롯, 박희태, 정재문 의원이 수행했어요. 앞서 질문한 대로, 출발도 하기전에「동행」이냐「수행」이냐는 문제가 언론에 터져 나왔습니다. 사실 이는 일부 언론에서 만들어낸 싸움입니다. 당시만 해도 기자들이 양재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출발 며칠 전 어느 신문사 기자가 「정치인이 가는데 정부의 현직 장관이 한번도 수행한 전례가 없는데, 김영삼 대표를 수행하는 것은 정부의 각료로서 체통을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라고 질문했어요. 제가 임기응변으로「전례없는 일이라고 꼭 그렇게만 생각하느냐. 정당대표는 정치적인 목적과 정당의 계획에 따라 소련을 방문하고, 나는 정부를 대표해 가는데 왜 할 일이 없겠느냐. 동행해 간다고 보면 문제될 게 없는데, 왜 전례 없이 수행해서 정부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이런 문답이 화제가 안됐어요. 그런데 그 기자가 민주계 당직자에게「박장관이 YS를 수행하는 게 하니라 동행한다고 발표했다」고 전했던 모양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도하 신문에서 가십으로 때리고 해 설기사로 공격해대는 겁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 민주계 당직자가 각 언론사에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 박장관이 모스크바에서 노대통령의 친서를 숨겨 악의적으로 골탕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당초 YS는 친서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노대통령으로부터 친서를 받아왔어요. 모스크바로 출발하기 전 YS에게「고르바초프를 만났을 때 친서가 전달돼야 합니다」라며 「친서를 드릴까요」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YS가「박장관이 보관하고 있으시오. 고르바초프를 만날 때 여러 사람이 갈 수 없고 나와 박장관 단둘이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소. 둘이서 모든 걸 함께 해야 되는 거요」라고 합니다. 대표가 직접 친서를 들고 다니지 않는 법이므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제가 친서를 죽 소지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해, 영빈관에서 방을 배정하는 것부터 잘못됐어요. 제방을 YS와 다른 층으로 해놓았어요. 그런데 이틀 지나 난데없이 본국의 안기부장으로부터「외신에는 YS가 고르바초크와 회담해 수교에 합의하는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도됐는데, 박장관은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전화가 걸려왔어요. 저는 깜짝 놀라 황병태 의원에게 물어봤어요. 황의원이「나도 잘 모르는데, 만나기는 만난 모양이더라」라고만 합디다.「언제 얼마 동안 만났는가」라고 하자, 「이분이 흥분해 있어 만났다는 이야기만 한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3~4분 걸렸다』

- 함께 모스크바를 갔는데 YS의 일정을 전혀 몰랐다는 말입니까.
『다른 층에 제 방을 배정해 놓았고, 또 그게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제가 황의원에게「내가 친서를 갖고 있는데, 회담해서 끝났다고 하니 가서 사정을 알아봐야겠다」며 함께 YS방에 들어갔어요. 이분이 상기된 표정으로 왔다갔다하며「박장관, 끝났어. 모든 게 끝났어」라고 해요.「대표님 어떻게 된 겁니까. 회담이 잘 된 겁니까」라고 묻자,「끝났어. 끝났다면 끝난 줄 알아야지」라고 합디다. 그래서「언제 어떤 내용으로 수교하기로 했습니까」라고 묻자,「만나서 잘 하기로 했으면 끝난 거지, 그 다음은 실무자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함께 만난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자,「충분히 할 얘기 다 했어」라는 겁니다. 고르바초프와 만났다면 장소와 시간, 배석자, 합의된 내용이 정확해야 되는데, 도무지 말씀을 안하니까 난감했어요. 그래서 제가「노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출발할 때 친서를 제게 보관하라고 하셨는데, 다 끝났다면 친서를 전달할 필요가 없겠군요」라고 떠보자, 이분이 그제서야 친서 생각이 난 것인지「내가 급히 간다고 박장관에게 미처 연락을 못했어요. 미안해요」라며「어떻게 전달할 방법이 없는가」라고 합디다.「수교 합의가 끝났다면 친서를 전달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아니야, 친서를 전달해야 돼. 어떻게 방법이 없는가」라고 합니다. 그래서「사실은 공산당 당사에서 당의 부부장과 비밀협상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다」고 했지요.「잘됐다」며 그 자리에서 친서를 전달하라는 겁니다』

박의원이 주장하는 친서 파문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다음날 안기부 Y공사와 외무부 소속 K대사를 수행해 비밀협상 테이블에 갔어요. YS의 말대로 한-소 수교협상이 끝난 것인지를 몰라 말을 꺼내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우선 떠 보았어요. 「김대표와 고르바초프간에 수교를 하기로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졌다고 하니 실무회담에 어려움이 있겠느냐. 이제는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게 좋겠다. 역사적인 회담을 축하하고 고르바초프에 감사한다」라고 운을 떼자, 소련측 대표가 정색하며「그렇지 않아도 상부의 지시에 의해 유감의 뜻을 표해야겠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회담도 합의도 없었다. 안부인사를 서서 나눈 게 전부였다. 그런데 고르바초프와 회담해 모든 게 원만하게 합의가 된 일인가.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으면 이 회담의 지속 자체가 의미 없는 걸로 본다」고 했어요. 「어제 김대표가 고르바초프를 만난 사실이 있지 않는가」「만나기는 했다」「취재진 때문에 김대표로부터 자세한 상황을 듣지 못했다. 그쪽 이야기는 무엇인가」「프리마코프 연방회의 의장이 고르바초프에게 김대표를 만나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프리마코프 방에서 김대표와 선 채로 악수했다. 차 한잔 마신 일도 없다. 극히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 받은 게 전부다. 3~4분 정도 걸렸다. 그런데 무슨 보도가 그럴 수 있느냐」「이제야 조금 알겠다. 김대표가 그런 발표를 한 게 아니고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이 추측 과장보도한 것 같다」이게 제가 들은 YS와 고르바초프간 회담의 진상입니다』

조선일보 1990년 3월23일자는 「극비대좌 50분 막전막후」라는 제하의 스케치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김최고위원은 또 TV카메라 기자들을 찾았으나 마침 주위에 없자 사진기자들에게『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니 현장에서 끝까지 남아 찍도록 하라』며 역사적인 회동의 모습을 남기고자 하는 희망을 강력히 표시하기도. 김최고위원 일행을 태운 리무진이 6시25분 정각 크렘린궁 정문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경호관계자들이 뒷자리에 동승했으며, 이들이 김최고위원을 대통령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김최고위원은 대통령 집무실 건물에 도착, 엘리베이터로 3층까지 올라가 응접실에서 대기중이던 프리마코프 연방회의 의장의 영접을 받고 유학구 통역관과 함께 옆방에 마련된 회담장으로 직행. 그러나 사진기자들은 집무실 경호원에게 입장으 제지당해 별도 휴게실에서 김최고위원이 나올 때까지 약 50분간 대기. 김최고위원은 『누구를 만나고 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오늘 1분도 쉬지 못해 몹시 피곤하다』는 말만 되뇌이면서도 상기된 표정에 성치감이 가득한 모습…」

『이 사람이 이처럼 일을 해』

- 비밀협상하는 자리에서 노대통령의 친서는 전달됐습니까.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나라 일을 그르치고 언론을 속이고, 함께 간 장관을 기만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 시점에서 이분을 근본적으로 다시 봤어요. 여하튼 제가 소련측 협상대표에게「노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니, 「무슨 소리냐. 서서 악수만 한 것인데, 당연히 친서를 접수해야겠다」는 겁니다. 친서만 줄 게 아니라 고르바초프로부터 답신을 받아가야 할 게 아닙니까. 1988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외무차관보인 루킨과 회담하면서 친서를 전달한 적이 있었으니, 이번이 두 번째 친서였어요. 이제는 소련측에서도 답신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소련측 대표는 북한과의 관계를 내세워 답서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도박을 한다는 심정으로「지구상의 온 나라가 친구가 돼야 하고 대화로써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고르바초프의 철학에 공감해 나는 2년전 수교하기 위해 왔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 수교 협상을 질질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돈과결부하고 있다. 수료한 후 경제 협력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수교의 조건으로 경제 지원은 할 수 없다. 고르바초프는 김대표와 나를 정식으로 접견하지 않았을뿐더러 답서도 주지 않고 있다. 출국하기전까지 고르바초프로부터 한-소 수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노력하겠다는 노트(Note)라도 주지 않으면 친서를 반환하라」더이상 귀측과 비밀협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러시아공화국의 옐친과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고르바초프와 옐친간의 갈등 관계를 활용한 셈이었지요. 당시 저는 옐친의 핵심참모와 이미 선을 통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예친쪽에서는 한국 방문의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습니다』

- 고르바초프로부터 답서를 받았습니까.
『4시간 가량의 협상을 마치고 영빈관에 돌아오니, 기자들이「총영사관의 설치는 예정대로 합의됐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어리둥절해「무슨 소리냐」고 하니,「YS와 황병태 의원이 실무적인 일을 하러 박장관을 보냈는데 아마 총영사관 설치를 합의해올 것이라고 해 그렇게 보도했다」는 겁니다. 저는「총영사관 설치에 합의한 적도 없다. 양국간의 수교 협상은 기초 단계에 있다. 앞질러간 보도 때문에 어려워졌다」고 답변했습니다. 이게 갈등으로 비쳐졌어요. 귀국 전날 소련측 협상 파트너가「친서를 잘 받았고 남북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정부가 어려운 대화를 하고 있으며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원칙적으로 기대를 갖고 해나가겠다. 다방면적인 교류 협력이 확대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노트를 전해 왔어요. 고르바초프가 구술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는데, 고르바초프 비서실장의 서명으로 되어있었어요. 서명 문제로 한참 승강이하다가 그냥 받아들였어요. 사실 이 정도도 파격이었던 셈이지요. 제가 YS에게 노트에 대해 보고하면 또 대대적으로 언론플레이를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어요. 귀국해 노대통령에게 전모를 직접 보고했어요. 노대통령은「이 사람이 이처럼 일을 해,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YS가 보고하러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노대통령이 그 메모를 보여주었어요』

『자네는 정치권에 부담만 주었다』

- 6공 후반기로 들어오면서 박의원이 주도해온 북방외교가 김종휘-노재봉팀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내막이 있었습니까.
『저는 노대통령과 고르비와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조건으로 노대통령을 처음으로 인터뷰하고 특집기사를 쓰는 기회를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정상회담의 준비 과정부터 우리팀이 배제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 내부에서 일종의 견제를 받은 거죠. 노재봉, 김종휘 등이「후세의 평가를 받게 될 북방정책을 박장관 개인의 전유물처럼 해서는 안된다」고 한 주장이 먹혀 들어간 거죠. 한-소 수교가 이뤄지고(90년 9월30일), 그 해 겨울 노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이 예정됐습니다. 그즈음 금진호장관, 최종현회장 등이 참석한 청와대의 가족모임에서, 제가「막대한 금액의 경협을 약속하면서 모스크바에 갈 필요가 없다. 그건 적절치 않다. 앞으로 고르비의 시대는 가고 옐친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대통령은 「박장관 자네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가. 고르비는 세계적인 지도자이고 미국 대통령과도 막역한 친구다. 앞으로도 계속 역사에 남을 것인데, 떠벌이 옐친의이야기를 자꾸 하면 안된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30억불의 경협을 약속하게 된 겁니다』

-YS와의 모스크바 방문이 있고서 얼마 안돼 박의원께서 정무장관직에서 물러난 걸로 압니다.
『YS는 자신의 실체가 드러난 점에 대해 제게 유감을 가졌어요. 그 뒤 내각제 문제로 저와 또 한 차례 충돌하고, YS가 노대통령에게 대들어 마산으로 내려가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결국은 노대통령이 YS의 압력에 밀렸습니다. 저는 노대통령에게 「이렇게 흔들리면 내각제도 못하고 향후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주변에서는 자네가 YS와 대결해 국내를 시끄럽게 하고 정치권에 부담만 주었다고 한다. 김윤환의 건의로는, 박장관을 일선에서 후퇴시키면 자신들이 내각제를 관철시키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칼을 쥐고 있는데 YS가 어떻게 내각제를 받지 않겠는냐고 하더라. 원내 3분의2이상 의석이 되니까 반드시 해내겠다는 거다」라고 답변하더군요. 저는 「앞으로 두고 보십시오. 이렇게 하면 내각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각제를 합의한 사실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합니다. 내각제를 공론화해 밀고 나가면, YS가 따를 수밖에 없고 명분도 섭니다」라고 했지만 노대통령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정국 불안으로 3당통합 했으며, 무엇인가 안정된 가운 편안함을 누려야 하지 않는가. 박장관 자네가 너무 조급하다 보니 이처럼 시끄럽게 평지풍파가 일지 않느냐」로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90년 4월 12일자로 사표를 냈습니다. 장관이 공개적으로 낸 사표가 5일 만에야 수리된 것도 전례가 없었어요. 그만큼 노대통령이 고심을 많이 했던 겁니다. 그 후로 제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고 YS가 득세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비서실장인 김윤환씨가 마산으로 모시러 내려가는 등 YS가 대통령과 붙어서 이겼다고 소문나니까, 권력 기생세력들이 그리로 붙기 시작한 거지요. 그런 과정에서 90년 5월 7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었어요』

『YS를 밀어라』

-언론에 공개된 내각제 합의각서는 바로 그 전당대회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하셨지요.
『실각 후 저는 한 달간 해외여행을 떠났어요. 그 합의서가 작성될 때는 국내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각제 합의 각서가 언론에 공개됐을 때 제가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당시 내각제 합의서는 노대통령이 YS에게「당신의 요구대로 박장관을 일선에서 후퇴시켰으니 내각제에 합의한다는 각서에 서명합시다」라고 해 작성됐습니다』

-당시 「노심」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습니다. 노대통령은 과연 차기 후계자로 YS를 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YS는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대통령이 자신을 도와줬다기보다는 오히려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뜻을 비췄습니다.
『91년 가을 노대통령은 압박해오는 YS에게 「당신밖에 없다」고 약속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해 12월경 노대통령은 제게 「대안은 YS밖에 없으니 그를 밀어라. 그와 잘 지내라」지시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은 안됩니다.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내각제를 전제로 3당합당했습니다. 또 제가 정무장관을 그만둘 때도, YS가 내각제 개헌에 앞장서지 않는 한 절대로 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는 YS를 후보로 밀지 않겠습니다. 박태준 최고위원이나 강영훈 전총리, 김준엽 전고려대총장, 김동길 박사라면 전폭적으로 밀겠습니다. 중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민다는 것은 제 소신과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대통령은「YS는 신의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역사와의 약속을 배신하는 사람은 박대통령 시대 이후 32년간의 역사를 파괴할 것입니다」라고 맞섰지요. 노대통령은 거듭해 「그렇지 않다.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제일 의리 있는 사람이 YS다. 그 사람, 의리를 갖고 일평생 정치를 한 사람이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다. 자네가 YS를 밀어라」고 종용했습니다. 제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제 뒷조사를 하는 등 압박을 가해왔어요. 막바지에 가서는 청와대 정해창 비서실장이 불러서 갔어요. 정실장이 메모를 꺼내 읽으면서 「각하의 말씀이니 잘 들어줬으면 좋겠다. 반YS 투쟁에서 손을 떼라. YS를 밀어라. 그렇지 않으면 외국으로 나가라. 불응하면 구속시키겠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대통령의 지시가 분명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정실장은「그러면 대통령께 내 말도 전해달라. 나는 지금까지 대통령과의 약속을 전부 지켰다. 그런데 대통령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 소신에 의해 정치의 길을 가는데 이처럼 극단적인 말을 한다면 서로 정치적으로는 끝났다. 앞으로 청와대에서는 내게 연락하지 말고, 설령 연락이 와도 응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반YS투쟁에 섰고, 6공정권이 끝날 때까지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노대통령의 탈당은 일시적 기분』

그는 『내가 반YS 투쟁 대열에 서면서도 그가 충성스런 참모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부러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털어놓았다
『92년 8월말쯤인가 최형우 의원이 저를 하얏트 호텔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박장관, YS를 좀 도와달라. 이번에 박장관이 출마하려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하자, 그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이번에 YS를 도와주면 다음에는 남자로서 모든 걸 걸고 박장관의 참모가 돼 받들고 도와주겠다. 민자당을 탈당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배, 지금 이 무대는 어차피 YS와 민주계의 무대이지, 함께 설 무대는 아닌 것 같다. 최선배의 말에 느껴오는 게 있지만, 그 무대에 함께 설 수 없는 내 심정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했어요

-YS 지지로 일관한 노대통령이 대선을 앞둔 92년 9월 갑자기 민자당을 탈당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혹시 사전에 노대통령의 탈당 문제를 놓고 상의한 적은 없습니까. 『그때는 서로 결별하던 기간이었으니 상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 막은 알고 있습니다. 노대통령의 탈당은 일시적 기분에 의했던 것입니다. YS에게 일시적으로 격앙했던 것이지요. 이동통신 사업자의 선정문제로 YS가 엄청나게 밀어붙였지 않습니까. 「선경그룹은 안되니까 다시 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노대통령은 충격을 받고 그런 결단을 내린 겁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중립적인 입장을 최하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동통신 선정 문제가 노대통령의 탈당 원인이 됐다는 것입니까.
『그 전부터 앙금이 쌓였지만, 이동통신 문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청와대 내부에는 탈당을 부추긴 핵심적인 참모 두세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대통령이 탈당을 선언해 놓고 그 입장을 계속 견지하지 못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곧 여러 사람의 설득으로 다시 번복한 겁니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알고 YS의 당선을 위해 총력을 쏟았어요. 조직과 자금 등 모든 역량을 다해 지원했습니다. 그분이 92년 9월에 탈당하고, 한 달쯤 뒤인 10월14일에 제가 탈당했습니다. 제가 탈당할 때는 이미 YS의 자세가 달라져 있었어요. 제가 탈당하기 전 노대통령에게 간단한 탈당 이유를 적은 메모를 전달했어요.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해 그랬습니다. 그런 뒤 정해창 비서실장과 통화했어요. 정실장이 「노대통령께서도 YS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데, 굳이 탈당까지 하느냐. 참고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YS는 92년 대선자금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 「노대통령이 탈당하고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노대통령을 만난 적도 없다」라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이른바 대선자금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한 겁니다.
『대선자금 운운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노대통령이 YS후보의 당선을 위해 조직과 자금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했다는 것은 정부 여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면 다 알고 느끼고 있는 사항입니다. YS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3허의 언론 플레이
6공의 막바지까지 달려온 시간의 흐름을 되돌려 박의원이 권력의 핵심부로 뛰어든 1980년대로 무대를 옮겨보자.

- 박의원은 처고종사촌인 노태우장군을 통해 신군부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압니다. 10.26 사건(박정희 대통령시해사건) 수사를 위해 합수부가 구성됐을 때 노장군이 당시 서울지검 공안검사인 박의원을 추천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합수부에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없습니다. 10.26 사건이 터진 뒤 노장군으로부터 그런 요청이 있었으나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걸 외도로 본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검찰총장-법무장관으로 성공하고 싶었어요. 하여튼 제가 거절한 그 자리에 정경식, 손진곤, 이건개, 김영일이 나갔죠. 하지만 1980년 5월 말경 국보위가 설립되자, 다시 노장군의 요청이 있었어요. 6월1일자로 파견근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국보위에서 법사분과위원을 맡아 헌법 제정에 실무적으로 참여했어요. 국보위가 해체된 뒤 청와대의 정무비서관으로 들어갔어요. 노장군의 사람이라고 견제가 심했어요. 제 자신스스로 국내 정치나 공작에는 거리를 두려고 했고, 비서실 멤버들도 저를 그쪽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했어요』

- 6공 출범 당시 인선 과정에서 박의원의 민정수석직 내정을 전대통령 쪽에서 비토했다고 인터뷰의 서두에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이는 박의원이 전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를 구속시켰다고 오해한 데서 비롯됐다고 했는데, 어떤 내막이 있습니까.
『1982년 5월 장영자 사건이 터지자, 청와대의 실세인 3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가 언론 플레이를 하면선 전대통령을 흔들었어요. 전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를 구속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갔어요. 그런데 누가 이씨의 구속에 대해 전대통령의 결재를 받아내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체제 안보와 관련된 문제니까 안기부장이 거론됐어요. 하지만 못 가겠다는 겁니다. 법무장관도 못 가겠다, 검찰총장도 못 가겠다, 청와대에서 해결하라. 그런데 비서실장도 못 가겠다. 그러다가 법무담당하는 제게 결재를 받으러 가라는 겁니다. 저는 소관도 아니었어요. 당시 상황으로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허화평 정무수석에게 함께 가자고 했어요. 허수석을 억지로 모시고 갔어요. 전대통령은 말이 없어요. 허수석도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각하, 대단히 어렵고 죄송스런 결심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입을 떼자, 전대통령이 딱 쳐다보면서 「뭐야!」라고 해요. 「검찰에 이미 출두해서 조사 받고 있는 상태다. 국민 여론상 다시 내보낼 수는 없고 영장을 발부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라는 식으로 설명 드렸지요. 전대통령이 「그 사실이 인정되는 거야? 된다 말이야, 어쨌단 말이야?」라고 역정을 냈어요. 저는 완곡하게 「검찰에서 치밀하게 확인한 결과, 보도된 내용이 사실인 것 같으니 매듭을 짓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전대통령은 잠자코 있었어요. 제가 다시「각하께서 결심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그래, 법 위반했으면 잡아넣어야지. 결심대로 해」라며 벌떡 일어서는 겁니다』

대북밀사

장영자사건과 관련된 그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이규광씨가 구속(1982년 5월 18일)됐으나, 발표된 사건의 전모에 대해 국민들이 믿지를 않아요. 대통령내외가 고민에 싸였어요. 제가 「이를 수습하려면 정공법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건의했습니다. 직접 장영자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중수부장과 일선검사를 TV에 출연시켜, 기자와 방청객들과 무제한으로 질의 답변토록 해 수사 결과가 의혹이 없음을 국민에게 알리자고 했지요. 사실 이는 검찰 사상 유례가 없어 나쁜 선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로는 정권의 사활이 걸려있었어요. 전대통령이 제 건의를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삼청동 안가에서 방송국 보도본부장과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수부장을 모아 방송 토론을 논의했습니다. 당시 김석휘 검찰총장이 「검찰의 체통이 있는데, 그런 방송에 나가봤자 국민은 믿지 않을 테고 검찰만 망신당한다」며 완강하게 버텼지만, 제가 「각하의 뜻」이라며 밀어붙여 방송됐습니다. 이 사건의 수습에 3허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어요. 대통령과 3허간에 골이 깊어졌어요. 3허가 언론에 장난쳐 자신의 통수권을 흔들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전대통령은 이규광씨가 구속된 이후 「3허에게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 해말 인사를 단행해 허화평, 허삼수씨를 내보냈어요. 그런 뒤 제게 정무수석을 권했습니다. 제가 사양하니까, 정무비서실에 속한 법무담당 비서관을 따로 독립시켜 수석회의에 제가 참여하도록 했어요. 85년 3월 장세동 경호실장이 안기부장으로 가면서 제가 당시까지도 직제에 없는 안기부장 특보로 발령났어요』

- 안기부장 특보 시절 대북밀사로서 평양을 왕래하며 남북한 비밀접촉활동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월간조선(1996년 11월호)에 게재된 「전두환-허담의 극비대화록」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박의원께서 협상실무대표로 활동한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저는 국내 정치나 공작과 무관한 분야를 떠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 마련을 위한 비밀접촉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반쪽만을 상대로 한 미국 편향 외교로부터 공산권을 포함한 전방위 자주외교, 즉 북방정책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것이죠. 저는 그 후로 7년간 밀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수십 차례의 비밀출장을 떠날 때마다 유서를 남겼습니다. 공개적인 북한 왕래는 신분 보장이 되므로 위험이 없지만, 비밀 접촉은 상대측에서 안보내주거나, 혹은 사고사 했다거나 전향했다고 발표한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제게 전권을 주고 맡겨준 전대통령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비밀접촉을 그분은 5공기간 중 단 한번도 정권 안보로 활용하거나 악용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세가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렇게 해서 분단이래 처음으로 85년 9월 남북한고향방문단 및 예술 인단 교환방문을 성사시켰습니다. 91년에는 남북한 축구와 탁구 단일팀을 조직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6공 후반기에는 남북한 총리회담이 열릴 수 있었지요. 김영삼 정권은 그동안의 결실을 모두 무너뜨린 채 남북한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어 걱정스럽습니다.』

막후 채널

- 아웅산 사태(83년 10월)가 있고 불과 1년 반만에 정상회담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일각에서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안전하게 개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추진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북한을 개방과 변화로 유도해,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을 한다는 절대절명의 민족적 열망에서 비롯됐습니다. 물론 86아시안게임이나 88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요. 하지만 그같은 행사를 위해 전략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또 정권을 유지하고 연장한다는 측면에서 구상됐던 것도 아닙니다』

- 아웅산 테러가 있은 후 남한 내부에서는 북한을 응징하고 보복해야 한다는 강경한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상회담을 먼저 제의한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더이상 소모적인 남북한간의 대결을 벌인다면 향후 펼쳐질 아시아-태평양의 시대에 한민족이 주역으로 등장할 수 없다는 깊은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이 있기 전에 이미 북측으로부터 수재 물자를 우리가 받아들인 겁니다』

- 취재한 바에 의하면 남북한간의 비밀접촉은 85년 4월경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세기 통일원장관이 북한의 손성필 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위원장에게 『서울에서 개최할 남북한 적십자회담에서 막후 접촉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서울서 열린 제8차 적십자회담에서 북측의 림춘길(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과장)과 우리측의 한상일(안기부장 비서실장)이 몰래 만나 남북한의 막후 채널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시작은 그렇게 됐지요. 막후 협상의 정식 명칭은 「남북간의 평화통일을 위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이었어요. 실무회담은 차관급으로 됐어요. 제가 수석대표, 통일원소속 K씨는 수행했습니다. 후반부에는 당시 안기부에 데리고있던 강재섭(신한국당의원)를 추가로 합류시켰어요. 북측에서는 한시해(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부부장)등이 나왔습니다. 이 막후 채널은 91년까지 7년간 지속됐습니다. 여기서 남북한간의 교류협력과 평화공존, 통일 방안에 대해 실무적으로 합의를 보고, 그 합의문을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발표하기로 했지요. 또 비밀회담에서 수석대표간에 핫라인(남북직통전화)을 설치한다는게 합의됐습니다』

핫라인

- 6공 들어 안기부장 특보에서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되면서 핫라인을 청와대로 끌어들이려다 안무혁 당시 안기부장과 마찰을 빚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안부장과 사표를 던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핫라인은 수석 실무대표의 방에 설치하는 걸로 비밀회담에서 합의됐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다른 직책에 가더라도 핫라인은 제 방으로 옮겨오는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안기부 조직의 성격을 감안해 저는 핫라인을 청와대로 옮기지 않았어요. 대신 브릿지(bridge)를 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브릿지해 사용하니 보안상의 문제가 있고 감도 안 좋았어요. 나중에는 북측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제가 안기부의 밀실로 가서 전화를 받곤 했어요. 제가 핫라인을 청와대로 끌고 들어온 적 없는데도 사실과 왜곡된 소문이 퍼졌습니다』

- 비밀협상 당시 수석실무대표인 박의원의 국내 직책이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까.
『비밀회담의 수석대표가 차관급으로 합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부장검사(1급예우)로서 안기부에 파견된 상태였어요. 저를 수석대표로 임명하기는 했으나 직급을 올려주지는 않았어요. 임시방편으로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위원」으로 발령낸 겁니다. 그 자리가 명목상 차관급이었어요. 그러다가 비밀회담을 진행하면서 어떤 해프닝이 있었는가 하면, 당시 제가 부장검사의 직책으로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측 대표단이 그 글을 입수해 보았는지, 「직급이 맞지 않다」며 강력하게 항의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를 검사장(차관급)으로 올리는 문제가 추진됐어요. 저는 사시 동기생보다 검사장을 3년쯤 일찍 달았어요. 하지만 검찰의 선후배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새로운 자리, 법무부 연수원에 연구위원을 새로 만들어 주었어요(그를 위해 만들어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자리는 94년초 폐지됨-주). 소위 검사장이 됐지만 검사장 행세는 하루도 해본 적 없습니다』

- 당시 비밀회담에서 우리측은 「우선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자, 두 정상끼리 만나 자유롭게 대화하면 큰 무제가 풀리지 않겠느냐」며 회담 성사에 더 비중을 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실무급에서 모두 합의한 뒤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 이는 북한측 협상대표의 입장이 없던 것으로 압니다.
『처음 비밀회담이 열렸을 때는 그랬지요. 북측에서는 실무회담에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실무회담에서 모든 걸 준비하려고 하지말고 남북한 두 정상이 만나 서로 자유롭게 토의하자는 유연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비밀회담을 풀어가는 일종의 기술입니다. 실제 우리측의 기본 전략도 실무급회담에서 완벽한 합의와 준비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어요』

- 당시 전대통령은 『장소는 서울이나 평양 어디든 좋다. 북측이 원한다면 다른 곳도 개의치 않으며 제3국도 좋다. 가급적 빠를 시일 내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지 않습니까.
『군출신은 단순하니까, 한다는 방침이 정해지면 한다, 만나서 못 풀 문제가 어딨느냐, 어디서 만나도 좋다는 이런 식으로 말씀은 했지요. 하지만 실무선에서는 차곡차곡 회담의 가닥을 잡아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 북측의 협상 파트너의 언행은 진지했습니까. 기만적이었습니까.
『양면성이 있지만, 우리가 숱하게 만나면서 서로 터놓고 이야기했던 게 사실입니다』

- 1985년 9월 북측 허담 밀사의 서울 방문이 있었습니다. 그 답방으로 장세동 부장과 박의원이 평양을 2박3일간 방문해(85년 10월)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것으로 압니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로 정상회담 추진이 부진해졌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평양에서 돌아와 보니 엄청나게 분위기가 바뀌어져 있었어요』

- 노신영 총리 등 국내 강경파들이 「정상회담의 무용론」을 제기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측면도 있었어요. 우리 정계-행정부의 핵심그룹이 미국적인 시각을 갖고 있고, 미국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 제가 벌이고 있는 남북한 당사자끼리의 비밀협상이 유쾌하지 않았을 겁니다. 고향방문단이 왕래하고 남북한 밀사가 서로 왔다갔다하는 걸 의심스런 눈으로 봤어요. 더욱이 미국 편향외교에서 벗어나 외교다각화의 일환으로 북방외교를 시작했지 않습니까. 당시만 해도 남한은 미국에겐 아시아의 전초기지였습니다. 남북한 당사자의 협상에 의한 정상회담 추진은 미국 국가이익 차원에서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어쨌든 평양을 다녀온 뒤로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어요』

- 전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먼저 제의하고 일년도 안돼 그 의지가 흔들리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당초 남북통일에 대한 원대한 철학이나 비전 없이 충동적으로 정상회담을 제의했기 때문에 그 의지도 쉽게 꺾였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청와대에서 중요 정책회의를 하고나면 10분 안에 미국대사관에 그 내용이 알려진 적도 있었습니다. 청와대 도청설도 이따금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지도층의 친미 성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더욱이 1985년 당시만 해도 안보-경제 부문의 미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원수의 결심에만 너무 많은 요구나 기대를 할 수는 없지요. 당시 미국 정보기관은 우리 안기부를 통해서, 미국 대사관이나 국무성은 외무부를 통해서 남북한 비밀접촉의 요지만을 통보 받았습니다. 저는 당시남북한 비밀접촉에 대해 미국측에 정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와 견제를 받았던 게 사실입니다. 한국과 같은 분단국의 상황에서 소신과 원칙을 갖고 나라 일을 수행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걸 많이 절감했습니다』

- 1985년 남북한 정상회담이 무산되는 과정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게 아니면 설명될 수가 없어요. 당시 총리를 비롯한 주요 핵심자들의 입장이 돌아서고, 대통령의 생각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다른 분석을 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겠어요』

-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정도에서 그만 합시다. 제가 현역 정치인이라 미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걸 양해하기 바랍니다.』

- 그렇다면 1985년 남북정상회담의 무산은 북한보다 우리쪽에 더 책임이 있었던 것이군요. 『공인의 입장에서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만, 당시 우리쪽에서 이 협상에 대해 경직된 방향으로 반전된 것은 사실입니다』

- 당시 북한은 진지하게 정상회담에 응하려는 자세가 있었습니까.
『서로간에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 갑자기 달라진 국내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다고 봅니까. 『실무적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 그때 무산된 아쉬움에 의해 6공 들어와 다시 정상회담을 추진한 바 있지요.
『물론 정상회담은 무산됐지만, 비밀 실무회담은 40여 차례나 계속됐지요. 적어도 제 입장은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가시적인 실적을 내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남북한의 정상간에 신뢰를 구축하는 한편 당면한 주요 현안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서로 접근해가는 데 있었어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았어요』

『유연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 실무대표의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하지만, 막상 통치권자라면 최초의 남북한 정상회담이라는 영예의 과실에 유혹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입니다. 전대통령이나 노대통령이나 두분 다 내심 그런 유혹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성급하고 준비없는 정상회담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분들은 남북한 문제로 인기를 노리거나 정권을 관리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비밀회담을 여유를 가지면서 수행했고 한번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 박의원께서 만나본 김정일은 어떤 인물입니까.
『남북한간의 문제는 너무 미묘하고 앞으로의 중대한 과제입니다. 제가 남북밀사였음을 밝히고 이 정도로 털어놓는 것도 처음입니다. 여러 곳에서 남북비밀 협상에 대해 산발적이고 무책임하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더욱이 알면서 질문하는데 동문서답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 가능한 범위에서 역사의 증언을 한다는 심정으로 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북한의 최고통치권자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이 문제에 관해 일해야 할지도 모르니 이해를 바랍니다』

- 얼마 전 미국 CIA의 전직 간부는 「북한은 2년 내 식량난으로 붕괴되거나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했고, 또 민족통일연구원에서도 「북한은 4년 안에 자체붕괴한다」라는 식의 보고서를 냈는데, 북한의 붕괴론에 대해 어떻게 전망합니까.
『오늘 이 시점에서는 남북한의 7천만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동질화해서 통일을 해나가느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북한은 식량난 등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어날 수 있는 동요를, 기습적 무력행동 등 외부적인 위기 조성으로 진정시킬 공상이 없지 않습니다. 북한이 막다른 방법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유연하고 대승적인 대북정책을 써야 합니다. 북한이 미국, 일본과 수교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이는 이미 1988년 7. 7선언때 우리 정부가 밝힌 내용입니다. 서방국가가 북한과 경제협력 하도록 뒷받침하고, 또 해외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해 교류협력 하도록 장려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북한과 평화공존하고 안심시키면, 북한은 자유민주체제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D-데이는 3월 말이었다』

이쯤해서 다시 권력의심장부로 인터뷰의 화제를 옮겼다.

- 김윤환 의원의 증언(월간조선 1994년 8월호)에 의하면 87년 4․13호헌조치는 「안기부 장세동 부장과 박철언이 만든 작품」이라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4․13 호헌조치는 우리 팀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아닙니다. 민정당이나 정부 사이드에서 일부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87년 3월 24일 경인가, 장세동 부장이 청와대에 다녀와서 「3월 말을 기해 호헌을 선언한 뒤 긴급조치 발표와 합께 정계개편을 하겠다」고 알려줬어요. D데이는 3월 말이었어요. 그런 방식으로 대통령이 결심했으니, 관련 홍보 자료나 연설문 초안을 준비해 보라는 지시였습니다. 우리 팀은 내부적으로 「긴급조치와 함께 정계개편을 한다는 것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다」며 모두 부정적이었어요. 보고서는 「국론 분열과 직선제의 폐해 때문에 88올림픽을 치를 때까지는 현행법대로 가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개헌 논의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라는 내용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연설을 할 필요가 없다. 긴급조치와 정계개편을 하면 안된다」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이를 청와대에 보고한 뒤 돌아온 장부장은 「3월말에 발표하지 않고 좀더 생각하기 위해 뒤로 연기됐다」고 했어요. 나중에 4월 13일 전대통령이 특별연설로 호헌 의지만을 밝히게 됐던 겁니다. 우리 팀에서 만든 보고서와는 약간 빗나갔지만, 긴급조치와 정계개편이 빠졌으므로 안도했어요. 특별연설이 있기 하루 전인 4월 12일 장부장이 연설문안을 보여주면서, 「박특보 의견대로 된 거 아니냐. 이게 홍보가 잘 돼서 여론이 좀 가라앉도록 총력의 노력을 하라」고 했어요. 아마 우리 팀이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면, 특별연설 바로 몇 시간 전, 정당의 수뇌부에게 보안을 요구한 채 그 연설문안과 홍보자료를 보내줬기 때문입니다. 아마 당에서는 제가 호헌 조치를 주도했던 것으로 착각했을 겁니다』

『6․29는 우리 팀이 주도』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핵심참모였던 입장에서는 이같은 호헌 조치가 두 달만에 다시 직선제로 바뀌었을 때 상당히 당혹했을 법한데요.
『6․29 선언을 전대통령측에서 너무 극화시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는 전․노 두분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현장에 있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대선의 기득권자 입장에 있는 노후보 진영에서는 직선제가 대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여러 계층의 지도자들이 노후보에게 직선제를 개진했습니다. 그래서 고심을 많이 했을 겁니다. 6월 17일 밤, 노후보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날 새벽 연희동에 들르니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날부터 선언문에 대한 기초작업에 들어가 6월 20일 1차 보고를 했습니다. 22일에는 전문의 초안을 만들어 보고했어요. 25일에는 수정안을 보고하고, 27일에 최종안이 완성됐어요. 이를 이병기 보좌역에 넘겨주었습니다. 6월 29일 아침 노대표가 「국민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선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팀이 만든 겁니다. 다만 이병기 보좌역이 읽기 수월하도록 활자 크기를 크게 바꾼 것을 빼고는 말입니다. 항간에서는 전대통령측이 6․29선언문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근거 없는 것입니다. 그쪽에서 골자가 내려왔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노후보는 제게 「직선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김대중씨도 사면하는 방향으로 해야겠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내가 전문과 8개항을 만든 겁니다』

- 전두환측에서는 이미 6․29선언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고, 그 연출에 따라 노후보가 연기했다는 주장입니다.
『두 분간에 직선제를 하자는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릅니다만, 가이드 라인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모든 실무 준비를 제가 했고, 선언 후 국립묘지와 현충사를 방문하는 문제도 제가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6․29선언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6․29선언은 역사적 의미가 있고 후세의 평가를 받을 게 분명합니다. 민주화의 대장정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6․29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크게 세가지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대선의 기득권자이면서 그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겸허하게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인 노후보가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전대통령도 직선제를 어드바이스했다면 공로가 있다고 봅니다. 거기다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민주화를 향한 도도한 민중의 요구입니다. 이 세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 6․29선언이라는 역사적인 선언이 나왔다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6․29선언에 대한 총체적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노대표 한 사람뿐일 겁니다. 전대통령측에서는 노후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게 전부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우리 입장에서는 노후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성안하고 실천했다고 할 수 있으니, 노후보야말로 이 양쪽을 다 알겠지요. 전대통령측은 우리쪽의 반을 모르고, 제 자신은 전대통령측의 반을 모르는 입장입니다.

월계수회 프로젝트

- 전두환측의 증언에 의하면 전대통령이 노후보에게 직선제안을 제시하자 노후보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받아들일 수 없다」며 화를 냈다고 하는데, 6월 18일 노후보를 만났을 때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6월 18일 새벽 노후보의 자세는 결연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고심했을 겁니다. 제 자신도 고심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전대통령이 노후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반응이 어떠했느냐, 현장에 있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대통령 임기를 마치는 입장에서는 직선제를 하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퇴임 후의 안전이나 평화로운 마무리를 위해 훌륭한 결심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버리는 노후보나, 그런 상황에서 작품을 만들어나가야 할 우리 입장에서는 다르죠.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안이 생명이었죠. 막상 결심해서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동안 노후보에게 「어느 누가 이야기해도 직선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안된다. 미리 새나가면 극적인 효과가 없어지고, 대선으로의 연결이 대단히 어려워진다」고 조언했습니다. 6․29선언 이틀 전 연희동 자택에서 현홍주, 최병렬, 이병기, 김종인등 여러 핵심들과 대책회의를 숙의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당의 일각에서는 직선제를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벌컥 화를 내며「무슨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느냐. 직선제의 엄청난 폐해를 모르느냐.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야될 게 아닌가. 88올림픽까지는 대통령이 발표한 대로 현행법대로 가고 올림픽이 끝난 뒤 내각제로 바꾸는 문제를 강하게 견지해야한다」고 한 적도 있어요. 큰 일을 성사시키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일시 생색을 내는 것은 창조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 노당선자의 부인인 김옥숙씨는 당선 축하차 집으로 방문한 전대통령 부부에게 『민정당이 인기가 없어 애먹었는데, 월계수회가 열심히 뛰어줘 당선됐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박의원하면 월계수회의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직을 준비해 대선에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6․29선언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대표를 위해 정책브레인으로 준비하고 보고하고 방향을 건의한 것은 5공 출범이래 계속됐습니다』

마폐(馬牌)

-사조직이 단기간에 쉽게 결성될 수 있었습니까.
『많은 이들이 이를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시 대선에서 민정당의 역할은 있었지만, 한계 또한 있었지요. 월계수회는 정치지망생을 모아 돈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노후보와 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을 전국적으로 리스트업하고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전국적으로 2백여개의 소모임을 만들고 다시 점조직으로 연결해 나갔습니다. 회원들에게 이념 교육을 시켜 자생력을 갖게 했습니다. 한 예로, 경기도 안양 근방 농민연수원에서 「노태우 스쿨」을 운영했어요. 제가 교장을 맡았는데, 「박회장」으로 통했어요. 전국의 거점 장들만 모아 1박2일간 교육시켰어요. 5기까지 배출해 졸업생이 1천5백명 됐습니다. 「노태우 스쿨」을 졸업할 때는 기념 메달을 줬어요. 노태우 흉상을 새기고 「꿈과 아픔을 동지와 함께」라는 글귀를 새겼어요. 정권 출범 뒤에 이 메달로 약간의 부작용이 생겼는데 …. 이른바 마패(馬牌)처럼 됐어요. 어째든 「노태우 스쿨」에서는 진짜 정수분자를 만들어냈어요. 요즘도 전국 어디로 가나 한줌도 안되는 지지자인지 모르나 산재해있어요. 이 교육기간중에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노대표 내외가 꼭 들렀어요. 선거 끝난 뒤 노대표가 사조직 때문에 선거에 이길수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 박의원이 5공 청산을 주도한 게 사실이지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됐을 때, 꼭 손볼 사람 중에 박의원이 거명된 것으로 전해들었습니다.
『당시 전대통령측에서 오해했던 겁니다. 그래서 손볼 사람의 리스트에 저를 넣곤 했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걸 요즘에 와서 알게 된 것 같아요.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게 87년 12월 16일이었고, 취임은 88년 2월 25일이었습니다. 이 사이에 5공과 6공간의 첨예한 갈등이 표출됐어요. 5공과 의 차별화를 통한 6공의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최병열, 이춘구, 이병기, 현홍주가 주축이 됐어요. 저는 내부 회의에서 「5공과 6공은 같은 뿌리다. 일시적 인기를 위해 5공을 지나치게 치고 파헤치면 자승자박이 돼 엄청난 어려움이 올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 때문에 취임준비위에서는 「박보좌관은 5공의 인물이기 때문에 수구적이다」라고 몰아붙였어요. 그런데 언론에는 오히려 제가 5공을 치는 악역으로 나왔어요』

『전경환 오라고 해』

그는 『당시 구속된 전경환씨 이야기도 덧붙여야 될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5공에서 정무비서관으로 있을 때, 전경환씨 문제를 보고드리다가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어요. 전경환씨가 월권을 한다는 제보가 확인해본 결과 다섯가지 정도 됐어요. 그래서 전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러 올라갔어요. 「항간에 전경환 회장에 대해 풍설이 많다」고 하니, 전대통령이 「어떤 풍설이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유언비어에 비서관이 현혹되면 되느냐」라고 했습니다. 저도 물러서지 않고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뭐야?」라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완곡하게 보고드렸는데, 이분이 그 자리에서 얼굴이 붉어지면서 인터폰을 통해 「전경환 오라고 해」하는 겁니다. 마침 전경환씨가 경호실에 들어와 있었던지 15분만에 나타났어요. 전대통령이 대질신문을 하는 겁니다. 전경환씨가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하니까, 전대통령이 제게 화를 내며 「비서관이 유언비어에 현혹돼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서야 되겠느냐. 전경환이 점퍼입고 전국을 다니며 새마을운동 한다고 애쓰고 있는데, 새마을운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해보려고 하는데….대통령의 동생이기 때문에 흘러 다니는 유언비어가 많아. 그 유언비어에 비서관이 현혹돼 조심시키라는 소리를 하다니!」라고 고함을 쳤어요. 저는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이런 풍설이 많아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통치권에 흠이 가고 민심에 나쁜 영향이 파급될 것 같아 그랬습니다」고 했습니다. 또 한번은, 전대통령이 저를 불러 「전경환이 대규모 부지를 제공하는 독지가를 찾아내, 훌륭한 프로젝트를 해보려는 모양인데 잘 협력해 도와주라」고 해요. 그래서 조사해보니 송사(訟事)가 얽힌 땅에다, 독지가도 전과가 있는 등 문제가 많았어요. 대통령에게 제가 확인한 걸 보고했더니, 대번에 「그거 사기꾼이구먼! 전경환에게 하지 말라고 그래」라고 해요. 전대통령이 솔직한 면도 있어요』

- 5공 청산 과정에서 전대통령 가족을 스위스 레만호의 한 별장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레만호 작전」을 박의원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그런가요.
『전혀 낭설입니다. 몇년전 어떤 잡지에서 레만호 운운하는 기사를 보고 웃었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5․6공은 한 뿌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무리 5공이 집권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과 노 두 분은 뿌리가 같은 겁니다. 여러 차례 노태우 대통령께「뿌리가 같은데 인기를 극대화하려는 욕심에 5공을 공격하게 되면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당시「노량진 수산시장 비리사건」이 터져 나와 5공의 이학봉 전 민정수석을 구속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었어요. 저는 노대통령을 면담해 「구속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피력한 적도 있었습니다』

힘이 센 사람
- 무슨 논리로 구속은 안된다고 했습니까.
『당시 이학봉씨 드러난 혐의는 극히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청와대 재직 당시 약간의 월권(越權)을 한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미미한 사안을 갖고, 다분히 5공․6공 단절이라는 정치적 의도에서 그렇게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지요. 「6공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5공의 노력이 있었는데 이러면 안된다. 더욱이 전임 대통령의 민정수석을 구속하는 것은 사실상 전임대통령을 치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니, 노대통령은 듣고만 있었어요. 제가 비밀출장 가있는 동안 이학봉씨는 구속됐어요. 장세동 안기부장도 마찬가지 경우였어요. 제가 국내에 있어서 유일하게 구속을 막을 수 있었던 이가 허문도씨였어요. 허씨의 구속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청와대, 검찰, 안기부 등 수뇌회의가 안가에서 열렸어요. 「허문도가 협박조의 항의를 하고 있지만 지금 분위기 상 구속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제가 「무슨 그런 결정이 있느냐. 이 정권이 끝난 다음 그 다음의 정권에서 어떻게 하겠느냐. 우리의 인기도 중요하지만 최소한 의리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 다음날 대통령께 보고해 허문도씨를 구속에서 제외시킨 겁니다』 현재의 시각으로 되돌아올 때가 됐다. 정권을 설계하고 나라의 운명과 승부했던 중년의 사내가 정력적으로 풀어놓은 증언은 장장 8시간만에 매듭이 됐다. 그는 힘이 센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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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초청특강(1998. 11. 3.)      관리자 2008/09/02 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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