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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슬롯머신 사건의 진상(신동아 / 95.5 / 유수호 변호사)

신동아 1995년 5월호

홍준표검사 주장은 일방적, 박철언은 정치재판 희생자일뿐 
          

                                                               劉 守 鎬(변호사/14대 국회의원)

법이 정치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물증도 인증도 없는
「사체 없는 살인사건」과도 같은 이 사건에 유죄 판례를 남긴다면,
정치적 강자는 언제든지 법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이다.

「신동아」 4월호에 게재된 홍준표검사의 인터뷰 기사를 접하며,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현직 검사이며 안기부 간부인 그가 왜 이 시점에서, 그것도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공개인터뷰를 통해 박철언 전의원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했느냐 하는 점이다. 굳이 법조문을 따지지 않더라도 정치관여가 금지돼 있는 안기부 간부가 특정 정치인을 비방하고, 검증되지 않은 사실로 명예를 훼손케 하는 말들을 여과 없이 뱉고 있는 것은 쉽게 납득이 어려운 대목이다.

최근 민심의 정권이반 흐름이 가시화되고, 특히 박전의원이 반민자 야권연합 전선 구축을 위해 애쓰고 있는 때에 나온 홍검사의 인터뷰는 「烏飛梨落」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당시 공판과정에 참여했던 변호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위와 같은 정치적 고려와는 상관없이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난 이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인터뷰 기사에 게재된 홍검사의 「일방적」 주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하는 것만을 밝히고자 한다.

「정치희생양」 여부는 역사와 국민이 판단

홍검사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박전의원이 「정치적 희생양」이냐 하는 부분에 대한 반박으로 인터뷰의 성격을 규정한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적 의견과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국법이 금하는 이적행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개의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특정사건의 수사검사로서 현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그 사건의 정치적 의미와 성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공개한다는 것은 검찰관으로서 취할 입장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헌정사 50년을 보더라도 정치보복의 성격이 짙은 민감한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치 보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재판부나 검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혹은 역사가 평가할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0년 3당통합, 민자당 출범 이후 박전의원은 누구보다도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통합시의 전제조건인 내각제헌법 개정약속이 지켜지지 않은데 대해 어려운 당내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다 끝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92년 10월 집권 민자당을 떠났다.

박전의원은 평소 「오늘의 정치는 이 시대 3대 과제인 국민화홥과 민주발전, 민족통합을 이루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정직과 신의를 지키는 정치풍토가 정립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원칙과 소신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따뜻한 집권여당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삭풍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들판의 외로운 겨울나무」가 된 것이다. 당시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속에서도 그의 용기와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이상을 향한 그의 강한 집념과 정열이 꽃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92년 12월 대통령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박전의원은 「정치보복 대상 1호」, 「구속대상 1호」로 지목되면서 표적수사의 대상이 돼온 것은 그 동안의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산 초원 복국집 도청사건, 용팔이 사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해외 재산도피 수사설, 박전의원 후원회 기업체에 대한 내사 등 여러차례에 걸쳐 정치적 탄압의 도마 위에 올려졌던 것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박철언 전의원은 결백했다. 그를 겨눈 화살은 번번이 빗나갔다.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해외로 도피하거나 굴종하는 상황에도 그는 몸을 피하지 않으면서 「서서 죽은 한이 있더라도 무릎 꿇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며 의연한 자세를 지켜왔다.

「표적수사」 증거, 앞뒤 안 맞는 얘기들

이제 구체적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보자. 우선 홍검사는 인터뷰에서 「박전의원을 처음부터 찍어서 수사한 게 아니고, 수사를 하다보니 박전의원의 혐의가 불거져 나왔다」며, 이 사건이 표적수사가 아니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검사 스스로 작성한 검찰의 수사기록과 검사의 법정진술에 의하더라도 이 사건이 표적수사임이 분명해진다.

93년 5월2일 검찰에 체포된 정덕진이 처음으로 박전의원과 홍여인의 이름을 거명한 것은 5월12일이었다(검찰수사기록 114쪽). 그러나 수사기록의 검찰보고서상(검찰수사기록 40쪽)으로는 이미 5월10일 홍여인의 은행계좌 보유현황이 보고 되고 있다. 법정에서 이 문제에 대해 변호인들이 추궁하자, 수사기법상 나중에 확인된 사실을 차례로 맞추기 위해 날짜를 앞당겨 기록할 수도 있다고 검사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표적수사일 수밖에 없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보고서에 첨부된, 은행감독원이 검찰에 송부한 FAX 용지 아래쪽에 희미하게 「1993-05-10, 17:21」라는 발신일자와 시간이 또렷이 찍혀 있다. 이것은 정덕진이 박전의원의 이름을 거명했다는 5월12일 이전인 5월 초부터 검찰은 은행감독원에 홍여인의 은행계좌 보유현황 등의 확인보고를 지시해 놓았다는, 「표적수사」의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이 박전의원에 대한 계속된 표적수사의 산물임이 분명해졌으니 박전의원이 정치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기에 그가 의원직을 상실한 후 치러진 지난 해 8월2일의 대구 수성갑 보궐선거에서 그의 부인인 현경자의원이 압도적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홍검사는 인터뷰를 통해 「수사중단의 압력이 여러 방면에서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홍검사는 「압력」의 실체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례를 밝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이는 게 수사검사로서의 바른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홍검사가 밝혀야 될 사실들

92년 4월 중순부터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한 정씨 3형제 관련 기사를 보면, 당시 정씨 3형제가 이른바 「한국판 마피아의 보스」로까지 거론되면서, 그 배후에 대해서도 수많은 얘기를 남기고 있다. 또 박전의원이 구속되기 전인 5월8일 제161회 임시국회에서 민주당의 이협, 박계동의원은 대정부질문을 통해 김영삼대통령 차남인 김현철씨 관련설에 대해 묻고 있다.

당시 도피 중이던 정덕일의 가택에 대한 압수수색이 실시됐는데,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후보와 정덕일이 정덕일 소유 호텔에서 함께 직은 사진이 발견돼 (「한겨레신문」 93. 5. 9) 무성한 뒷얘기를 남겼던 것 또한 사실이다.

홍검사는 또 박전의원을 「5 ․ 6공 통틀어 온갖 공작정치를 일삼은 독재의 주역」이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의 인터뷰 의도가 이른바 「슬롯머신사건」을 둘러싼 비화를 밝히려는 것인지, 박전의원에 대한 이미지 실추공작을 하려는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홍검사가 말하는 공작정치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라도 박전의원이 정치공작을 한 구체적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홍검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박전의원이 대학생시절 6 ․ 3 학생운동의 숨은 주역으로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의 각종 선언문을 도맡아 작성해 왔고, 법대 2백시간 단식투쟁에도 앞장서는 등 (「뉴스메이커」 93. 9. 16), 소신과 원칙에 따라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에 앞장섰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정치인을 비방할 목적이 분명한 듯한 홍검사의 이러한 발언은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홍검사는 항소심에서 정덕진의 「양심선언설」과 관련, 정덕진이 홍검사에게 「사실은 박의원의 변호사들이 구치소로 면회와 꾀길래 한번 그래봤다」라며 발을 빼더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변호인들이 서울구치소에서 정덕진을 면회해 허위사실을 증언하도록 꾀었다는 말이다.

당초 정덕진의 양심선언 설은 94년 1월31일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정덕진이 1심 때와는 다른 태도로 증언하기 시작했고, 홍검사의 신문에 대해서도 1심 때와는 상당 부분 다르게 증언하는 데서 시작됐다.

94년 2월 중순경, 서울구치소로 동료 변호인이 접견 갔을 때 박전의원은 『구치소 내에서 정덕진을 만났는데, 정덕진이「박의원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저도 남자입니다. 2월18일 선고공판(정덕진에 대한 항소심)이 끝나면 제가 나가든 계속 있는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만약 제가 석방되면 2~3일 정도 있다가 주위사람들을 설득해 기자회견이라도 하겠습니다. 제가 못나가게 되면 변호사님을 보내주십시요. 변호사님께 모든 진실을 밝혀 박의원님의 결백함을 밝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서, 정덕진의 항소심 결과를 보고 대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변호인들은 정덕진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 결과를 보고, 정덕진 접견신청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측의 집요한 방해로 정덕진과 만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었다. 이것이 이른바 「정덕진 양심선언설」과 관련한 전부이다. 서울구치소에 보관돼 있는 정덕진에 대한 변호인 접견록을 보면, 우리 변호인들이 정덕진을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공익의 대변자라는 검사가 있지도 않았던 일들을 들먹이며 「꾀었다」는 자극적인 말로써 허위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법 이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인터뷰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홍검사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홍검사는 『제 딴에는 검찰 선배라서 수사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 겁니다. 어떤 부분은 밖으로 밝히지도 않았어요. 서로 말을 하자면 저도 할말이 많습니다. 「그냥 쫙 밝혀 버릴까 보다」』라며, 마치 밝히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있기라도 한 듯,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또 그는 『집안을 여기저기 뒤지고, 또 항간에 나돌던 소문대로 그의 집 마당을 파헤치면 수표 몇 장은 나오리라 확신했던 것입니다』라며 독자들의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홍검사가 말하는 항간의 소문은 내가 과문한 탓인지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 대하는 것이다. 또 헌수표 몇장이라도 나올 것을 확신했다면, 어떤 물증도 확보하지 못한 검사로서는 당연히 박전의원 집을 수색했을 것이다.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시켜, 거짓과 진실을 혼동하게 하는 홍검사의 교묘한 이야기는 공소사실과 아무 관계없는 피고인의 사생활에 관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법원에 제출한, 이른바 홍검사 스스로가 말하는 「탄핵증거」부분에서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수사기록에 있는 내용은 추잡하기 이를 데 없다』라는 기자의 취재 형태를 빌려, 이른바 「탄핵증거」로 제출됐다는 수사기록에 마치 부도덕한 구체적 사생활 내용이 담겨 있는 듯 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인터뷰 기사 앞부분에도 언급됐다시피, 취재기사는 사전 약속도 없이 95년 3월13일 밤 「무턱대고」 홍검사의 집을 찾았다. 「추잡」운운했지만 기자는 그 당시 수사기록도 못보았을테니 그것은 기자가 만든 말이 아니라, 홍검사가 취재기자의 입을 빌어 그런 표현이 나오도록 된 것이라고 집작할 수밖에 없다.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특정 정치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 자신 법조인의 한사람으로서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웃지 못 할 「웃기는 얘기」들

홍검사는 인터뷰를 통해 寓話가 아닌 「愚話」 두가지를 자신의 입으로 얘기함으로써, 당초 인터뷰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또 그의 얘기를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동을 조장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가 마지못해 이루어진 것인 양, 또 첫 인터뷰인양, 마치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하는 양 연막을 피움으로써, 자신의 일방적이고 공허한 주장의 신빙도를 높이려는 고도의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홍검사는 취재기자에게 『정식으로 인터뷰하는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입니다』라든가, 『검사가 무슨 인터뷰인가. 인터뷰가 나가면 나 검찰에서 죽어요.』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신동아」와의 인터뷰 이전인 3월8일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첫 인터뷰를 한지 닷새 후에 「첫 인터뷰」 운운하는 것을 사소해 보이는 예지만, 그의 진실성을 검증해볼 수 있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또 그의 언론플레이가 어느 정도 치밀하게 계산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실례라 아니 할 수 없다.

두 번째 愚話. 홍검사는 홍여인을 찾아낸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 사건이 표적수사가 아니라 그의 말대로 『수사를 하다보니 박의원의 혐의가 불거진』 사건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홍검사는 정덕진으로부터 『박의원에게 돈을 준 사실은 있지만, 내가 직접준 게 아니고 내 동생 덕일이가 홍씨성을 가진 여자를 통해 줬다』고 하며, 홍씨의 인적 사상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그저 언젠가 홍씨로부터 부천 지역의 한 장급 호텔을 산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검사는 즉시 수사관을 부천으로 풀어 장급호텔의 등기부 등본을 모조리 뒤져 원매자중 홍씨 성을 가진 여자를 찾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리 찾아도 그런 사람은 없다』는 보고였고, 그래서 『보존기간이 지난 폐쇄등기부라도 찾아보라』고 시킨 결과 홍여인의 이름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황한 얘기를 언뜻 들으면, 홍검사가 집요하고 치밀하게 수사를 지휘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당초 정덕진이 박전의원의 이름을 거명한 것이 93년 5월12일이고 홍여인에 대한 수사보고가 이뤄지는 시점은 5월10일이었다는 점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덕진으로부터 홍여인에게 호텔을 샀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홍여인의 인적 사항을 파악할 요량이었다면, 정덕진이 소유하고 있는 또 소유하고 있었던 호텔들의 등기부 등본만 떼어보면 전 소유주의 인적사상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천에 소재하는 그 많은 장급여관 이상 모든 숙박업소의 등기부등본과 폐쇄등기부 등본까지 떼었다니, 수산의 기초를 간과한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홍검사가 이렇듯 앞뒤가 안 맞는 얘기로 일관하는 것은 이 사건이 표적수사, 각본수사였다는 지적에 대한 변명에 급급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표적수사, 각본수사 논란과 함께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흥정수사」를 했었다는 것은 본인의 입으로도 확인해 주고 있다. 홍검사는 『정덕일씨로부터 박철언의원 등의 범죄증언을 듣는 대신 불구속처리를 약속했다』면서,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잡아넣느냐」는 지적과 함께 정덕일을 구속하라는 지시가 대검찰청으로부터 있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홍검사는 정덕일이 구속될 경우 박전의원 등에 대한 공소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 불구속 결정의 배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홍검사는 광주 건설폭력배 사건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검찰청에 와서 반성문을 쓰면 선처해 주겠다.」는 암시를 은연중 내비쳐 이를 믿고 온 업자들에게 차례로 쇠고랑을 채웠다는 것이다. 나중에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며 항의하는 업자에게 『우리가 언제 구속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느냐』고 맞받았다고 까지 했다.

그렇다면 위헌규정의 논란이 있는 형사소송법 제221조 2의 규정을 악용하면서까지, 93년 5월27일 정덕일에 대한 공판기일전 증인신문까지 마친 상태에서, 대검의 정덕일에 대한 구속지시를 사표까지 써가며 막을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공판과정을 통해 드러나 또 다른 「우화」 한가지를 소개하겠다. 93년 5월이었던 도피 중이었던 정덕인을 이 사건에 관해 자필로 작성한 진술서를 변호인을 통해 수사검사인 홍검사에게 정식으로 제출했다. 정덕일이 이 사건의 진상을 기재한 최초이자 유일한 이 자필진술서는 기록에 편철되지도 않았고, 홍검사가 찢어버려 항간의 무성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 자필 진술서의 검찰제출은 언론에도 보도 됐었다. 1심 1차 공판시 변호인측에서 검찰 수사기록에 빠져있는 이 자필진술서의 소재를 묻고, 정식제출을 요구했다. 그때 홍검사는 『찾아보고 제출토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1심 3차 공판때 홍검사는 정덕일의 자필진술서라는 문서를 재판장에게 제출했다. 변호인측에서 정밀 검토해본 결과 그것은 정덕일이 자필로 쓴 진본이 아니어서 엄중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홍검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당초 진본은 찢어버렸다. 언론에 유출되면 곤란하니까 찢어버렸다』(공판기록 687쪽)고 변명에 급급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법조계 주변이나 정치권에서는 이 자필진술서에는 공소사실과 달리 「90. 10 중순경 정덕일이 직접 준 것이 아니라 홍성애에게 007 돈가방 전달을 부탁했다」 「매장 수입금을 모은 현금 5억원을 007가방에 넣었다」 「정씨 형제가 14대 대선시 여당후보에 대한 정치 헌금과 관련, 검찰에 협상조건을 제시했다」는 내용까지 담겨있다는 풍설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현금 5억원은 라면 상자 3개 분량으로 보통 성인 남자의 힘으로는 들기 어렵다).

그렇다면 홍검사는 이 사건의 유일한 행위자라는 정덕일이 검찰에 출두하기 전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성한 하나뿐인 자필진술서를 왜 찢어버렸을까? 자필진술서의 내용은 무엇이며, 왜 홍검사는 엉겁결에 『언론에 유출되면 곤란하다』고 얘기했어야 할까?


바로 잡혀야 할 터무니없는 주장들

이른바 「슬롯머신사건」으로 불리는 「박철언의원 사진」의 가장 증핵적 부분은 바로 「헌 수표」이다. 홍검사는 인터뷰에서 『뇌물사건 중 물증이 없는 경우가 80%는 됩니다. 뇌물을 수표로 주는 사람은 초보잡니다. 어떤 바보가 추적이 가능한 수표로 줍니까. 대부분 현금거래죠』라며, 『물증 없이 유죄가 확정된 대법원 판례가 어디 하나 둘이요』라는 일방적 주장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다.

당초 이 사건에서 「헌 수표」가 등장한 것을 돈을 주고받았다면 최소한 돈을 주었다는 사람의 구좌에서 그 돈이 빠져나간 흔적이 있어야 함에도, 주지 않은 돈을 주었다고 하려니 출처불명의 「헌 수표」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본다.

공판과정을 통해 왜 「헌 수표 뭉치」를 모아주었느냐는 변호인의 추궁에 정덕진형제는 당시 세무조사기간 중이라 두려워 은행 출입을 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씨 형제는 세무조사가 한창이던 90년 10월경에도 가명 「최병의」 등 새로이 7개의 가명구좌를 개설했는가 하면(정덕진 공판기록 941~944쪽), 90년 10월29일 한일은행 무교동 지점에 9억9천만원의 대출금 변제를 위해 자유로이 은행을 출입했다(정덕진 공판기록 930~935쪽).

당시의 정황이 검사가 「헌 수표」를 운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보다 분명한 증거는 93년 8월24일 1심 4차공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정덕진의 경리 상무 이부영씨의 증언이다. 이씨는 『그 당시 9억9천만원의 대출금 변제를 위해 한미은행 영동지점에서 적금을 해약해 3억~4억을 마련하고, 나머지 5억~6억원은 가명계좌에서 인출했다』고 증언했다. 건네줄 돈을 「헌 수표」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근거로 제시한 은행 출입의 어려움 등은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 하나 홍검사는 물증 없이 유죄가 확정된 대법원 판례를 말하며 명성사건 때의 교통장관과 5공비리 때 서울시장의 경우를 그 예로 들었다.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두 사람 모두가 사실을 인정하고, 받았다는 사람의 뇌물 사용처가 분명한 경우에만 별도의 물증이 필요 없는 것이지 피의자가 수수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쌍방의 계좌나 장부 등 그 어디에도 금품수수의 흔적조차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검사가 물증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뇌물사건의 80%가 물증이 없는 경우라는 홍검사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얘기다. 박전의원 사건의 경우는 인증도 물증도 없는 그야말로 「사체 없는 살인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죽었는지도 특정되지 않는 살인사건」이었다는 것은 재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홍검사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드러난 정씨 형제의 2백70여개 가명계좌」에 대한 변명인 듯 하다. 지난 3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박전의원이 『정씨형제의 드러난 2백70여개 가명계좌가 더 이상 추적되지 않은 것은 그것을 다 밝혔을 때 현정권의 지뢰밭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우선 현정권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왜 홍검사가 나서서 펄쩍 뛰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정덕진에 대한 공판기록 940~955쪽을 보면, 93년 4월26일자로 검찰주사보 박모씨가 홍검사에게 정덕진의 비밀계좌 추적에 대한 수사보고를 하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당초 국세청이 밝혀낸 정덕진과 관련된 가명비밀계좌는 중소기업은행 잠실지점, 서울신탁은행 등 4개 지점의 3백46개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 수사개시 시점인 93년 4월 현재 해지되지 않고 사용되던 가명계좌는 1백25개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홍검사는 『우리가 수사대상으로 삼은 것은 국세청이 밝혀낸 86년부터 90년초까지의 정씨일가 비밀계좌 2백27개였어요. 로비는 원래 힘있는 곳에 몰립니다. 그 당시 힘 있는 세력은 TK뿐이었어요』라면서 여러 방면에서 수사중단의 압력이 있었다며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고 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이미 드러난 3백46개의 정씨 일가 가명 비밀계좌는 90년초까지가 아니라 90년 12월10일 새로이 개설된 게좌까지 포함돼 있으며, 90년 1월22일 3당통합 이후 새로이 개설된 가명 비밀계좌도 46개나 된다(정덕진 공판기록 943~955쪽). 그렇다면 홍검사는 왜 이미 국세청이 밝혀낸 정씨 형제의 가명비밀계좌에 대한 추적조차 포기했는지, 또 왜 이 시점에서 정씨 형제의 가명계좌가 어디의 지뢰밭인지에 대한 공방에 앞장서 나섰는지를 스스로 밝혀야 할 것이다.

또 하나 홍검사가 사실을 뒤집어 거꾸로 얘기하는 바람에 잘못 알려질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바로 잡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홍검사는 당초 박전의원에 대해 혐의를 갖게 된 배경설명으로 정덕진이 88년부터 90년까지 탈세부분에 대한 조사에서 『정씨는 형사고발을 면하고 세금 추징만 당했을 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93년 5월3일 정덕진이 검찰에 구속되기 전인 4월19일 검찰에 출두, 참고인 진술을 한 당시 세무조사반장 김영수씨는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형사고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이 건도(정덕진의 90년 10월 세무조사) 형사고발 문제는 전혀 논의된 일조차 없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검찰수사기록 111쪽). 김씨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통해서도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형사고발 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분명했다(공판기록 1357쪽).

만약 홍검사의 말대로 『거액 탈세에 대해 추징만 당하고, 형사처벌을 면하게』된 것이 박전의원에 혐의를 두게 된 단초가 됐다면, 당시 관련된 탈세 조사 담당자들에 대한 청탁유무와 특혜조치 유무를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박철언 의원은 결백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검찰수사기록, 1심 공판, 항소심을 거치며 드러난 수많은 진술들을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사체 없는 살인사건」격으로, 박철언 전의원은 결백하다는 것이다. 공판과정에서 변호인측과 검찰측이 공방을 벌였던 주요 쟁점들을 다시 정리해 보며 박전의원이 왜 무죄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90년 10월 초순경 그 당시 정덕진 형제가 박전의원에게 「탈세조사를 완화해주고 형사고발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청탁해야 할 급박한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청탁이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세무조사가 청와대사정비서관 「주도」로 행해졌다는 명확한 자료도 없고, 정덕진 형제는 이미 그 당시 권력 내부에서 박전의원의 위치가 상당히 약화되고 미묘한 처지에 있음을 알고 있었음도 밝혀졌다.

검찰의 전수사기록에 의하더라도 「5억원이 든 007가방」은 정덕일이 피고인을 만난 그 당시에는 준비조차 될 수 없어 존재하지도 않았음이 드러났다. 정덕진 형제는 초면의 고위공직자에게 수천장의 헌 수표뭉치로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 세무조사로 모든 통장, 도장이 압수됐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법정에서 그 당시 가명계좌 통장, 도장은 하나도 압수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앞서 말한 대로 은행도 계속 이용하고 있었음이 판명됐다.

홍여인 집에서 있었다는 박전의원과 정덕일의 첫 대면 「시나리오」는 너무 비상식적이어서 우리의 사회통념과 맞지 않는다. 초면에 청탁하고 돈가방 열어보여 확인시켜주니 『동지 합시다.』고 하면서 박전의원이 직접 돈가방을 들고 나가더라는 말이 얘기가 되는 소리인가? 그 후에도 아무 약속도 없이 사우나 탈의실로 찾아가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잽싸게 박전의원에게 접근, 두 번이나 헌수표 뭉치로 거액 돈봉투를 찔러 넣어주었다는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일인가? 공판과정에서 정덕일은 박전의원이 사용한 탈의실 옷장 위치를 전혀 다른 곳으로 지적함으로써 그의 진술이 조작된 것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정덕일 형제가 박전의원에게 접근하기 위해 가장 믿을 수 있는 홍여인을 택했다고 했으나 홍여인은 두 사람의 인사자리만 마련했을 뿐 그 후 아무런 구체적 역할도 맡지 않았다. 그러나 거액추징이 되자 정덕일이 홍여인에게 불만스런 얘기를 했다고 하는 모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박전의원에게 세차례에 걸쳐 6억원의 거액을 제공하고 청탁했다고 했으나 세무조사는 외부의 어떠한 부탁이나 개입 없이 3차례나 조사기간이 연장되고 철저히 조사돼 1백27억원이 추징조치 되는 등 엄정하게 진행, 완결됐음도 공판과정을 통해 확인됐다. 정덕일이 직접 박전의원에게 세차레나 거액을 제공했다고 하면서도 5개월여 계속된 세무 조사중 단 한번도 상의하거나 연락한 일조차 없었고, 거액이 추징 통보된 때는 물론 그 후 2년6개월 동안 단 한번의 전화연락조차 없었음도 밝혀졌다.

언론으로부터 「한국판 마피아 보스」들로 지칭되면서 엄청난 비리와 탈세혐의를 받은 정덕일 3형제에 대한 이례적일만큼 관대한 조치의 보장에 대한 전제조건이 검찰의 박전의원 등에 대한 수사 협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정덕일 형제 등의 진술에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단언하건대 없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정덕일의 최초이자 유일한 자필진술서가 검사에게 제출됐으나 검사는 이를 찢어버렸다고 했다. 또 공소유지가 불가능해지는 듯하자 검찰은 공소사실과 아무 관계없는 박전의원의 개인적 생활 영역에 대해 흠을 입히려 집요하게 기도해 왔다. 그리고 다른 비리를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박전의원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괴롭혀 왔다. 결국 이 사건은 처음부터 아무런 물증이 없었다. 그나마 검찰에서 내세운 관계인들의 진술 중에서도 핵심적 사항은 모조리 뒤집히고 무너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듯한 목격자라는 홍여인의 10차례에 걸친 검찰 진술은 그 임의성이 크게 의심 받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진술 내용이 번번이 바뀌어 일관성이 없음이 검찰기록상 명백히 드러났다. 홍여인은 지난 10년간 정덕일 형제와 특별한 인간적 ․ 경제적 관계를 지속해왔으며 지금까지도 정덕일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는 등 사실상 그들의 영향권 내에 있는 독신여성이고 검찰의 요망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당초부터 홍여인이 자유로운 객관적 증인의 입장에 있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더구나 홍여인이 사실상 증인출석을 거부한 상황에서 임의성이 의심스럽고 일관성이 없으며 위헌적 절차에 의한 증인 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이나 증거가치를 부여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리이다.

이 사건은 당초부터 박전의원을 유죄로 인정할 수 있을만한 자료는 아무 것도 없었고, 박전의원은 처음부터 그 무고함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박전의원이 이 사건과 관련, 검찰에 자진출두하기에 앞서 『정치에 몸담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친지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슬롯머신업자로부터 청탁명목으로 돈가방을 받으며, 가방내용물을 확인하고 「동지 합시다.」고 할 정도로 막 살지는 않았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기억된다.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박전의원에 대한 판결이 확정됐을 때, 우리 변호인들은 멀지 않는 장래에 진실이 밝혀질 것을 확신하며, 모든 공판기록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공판기록을 뒤적이면서, 또다시 박철언 의원은 무죄였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시체 없는 살인사건」이 유죄라니…

어찌됐든 박철언의원 사건은 지난해 6월 박전의원에 대한 판결이 확정됨으로써 재판절차는 일단 막을 내렸다. 박전의원의 무죄를 확신하는 변호인으로서 그의 결백함을 밝혀 무죄판결을 끌어내지 못한데 대해 박전의원이나 그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박철언의원 사건은 50년대 조봉암 간첩사건, 80년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같이 실정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고도로 민감한 정치사건일 수 있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위헌의 소지가 있는 형사소송법, 제221조의 2의 규정인 공판기일전 증인신문을 악용, 정덕일과 홍여인이 「죽음에 임박하는 등」 증거보전절차의 요건을 구비하지 못했음에도 피의자인 박의원이나 변호인이 참여도 못한 채, 두 사람의 「말」로만 시작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인 측에서는 형사소송법 제221조 2의 규정이 위헌이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냈으나 지금까지 어떤 통보도 없다.

공판기일전 증인신문제도는 유신정권시절인 73년 검찰의 수사편의를 위해 채택된 제도다. 이 제도에 인권보호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음은 재야 법조계를 중심으로 수없이 지적해온 바 있다. 비록 「박의원사건」을 통해 공판기일전 증인신문의 위헌 여부를 가려내지는 못했으나, 앞으로 인권유린의 여지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조항은 삭제돼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박의원에 대한 구속 수사가 과연 법의 운용 측면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검찰의 기소내용 대로 가정하더라도 알선수재에 대한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1천만원 이하의 비교적 가벼운 죄에 속한다. 정덕일은 8억1천만원의 거액을 탈세하고 거액의 뇌물을 공여했는데, 그 법정형은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인이다. 이러한 정덕일을 불구속 처리한 것은 법조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도주의 우려도 없고 또 검사가 증거보전까지 마쳤다 하니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는 현역 국회의원을 구속 수사한 것이 형평과 이치에 맞는가.

그리고 구속된 상태에서 1심 6개월, 2심 4개월이라는 소송기한에 쫓겨, 충분한 심리 없이 미진한 상태로 서둘러 사건을 종결짓게 됨으로써 박전의원이 결백하고 무죄라는 사실을 증명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것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직도 이 나라에서는 검사가 유죄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무죄를 증명해보여야 하는 반인권적인 특수영역이 존재하는 것인가.

언젠가 박철언 전의원은 『권력은 강한 듯하나 약하고 짧으며, 역사는 유구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은 앞으로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또 하나의 올가미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법이 정치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물증도 인증도 없는 「사체 없는 살인사건」과도 갚은 이 사건에 유죄 판례를 남긴다면, 정치적 강자는 언제든지 법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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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BS 박경재의 전망대" 라디오 인터뷰(2002.10.25)      관리자 2008/09/02 4796  
4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초청특강(1998. 11. 3.)      관리자 2008/09/02 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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